성경 낯설게 보기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누가복음 23:32–35).
이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기괴하고도 강렬한 대조를 보여준다. 흔히 십자가를 '숭고한 희생'으로만 그리지만, 실상은 아주 세속적이고, 잔인하며,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 군상들이 뒤섞여 있는 현장이다.
1. 1/3의 확률: '행악자' 사이에 끼인 예수 (32-33절)
성경은 예수를 독보적인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고, '또 다른 두 행악자'와 묶어버린다.
*해석: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섰다. 멀리서 보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똑같이 발가벗겨졌고, 똑같이 피를 흘린다.
*새로운 시선: 예수는 '거룩한 고립'을 택하지 않으시고,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과 '동일 수치'에 서셨다.
*통찰: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밑바닥으로 내려오실 때,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시각적 답변이 아닐까? 예수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사형수들의 비명과 악취가 진동하는 '해골(골고다)'이라는 쓰레기장에서 인류와 연대하셨다.
2. "알지 못함이니이다": 무지라는 무서운 권력 (34절)
예수님의 첫 마디는 복수가 아닌 '용서'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독특하다. "착하니까"가 아니라 "몰라서 저런다"는 것이다.
*해석: 로마 병사들은 그저 상부의 지시대로 못을 박았고, 옷을 나눠 가졌다. 그들에게 이것은 '업무'였고 '수입'이었다.
*새로운 시선 : 악은 거창한 악마의 계획보다,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평범한 무지'를 통해 가장 잔인하게 실현된다.
*통찰: 예수는 그들의 '악의'보다 '무지'를 더 깊이 불쌍히 여기셨다. 자기가 신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제비뽑기나 하고 있는 인간의 '영적 감각 상실' 이야말로 예수가 보신 가장 큰 비극이었다.
3.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구원에 대한 천박한 정의 (35절)
종교 지도자들과 관리들은 비웃는다. "남은 구원하면서 왜 너는 못 구하냐?"
*해석: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구원 =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다. 힘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다.
*새로운 시선: 하지만 예수는 '구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머무는 역설을 선택하셨다.
*통찰: 관리들은 '내려오는 능력'을 구원이라 불렀지만, 예수는 '내려오지 않는 인내'를 구원이라 정의하셨다. 세상은 "자신을 구원하라"고 외치지만, 예수는 "자신을 버림"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다. 여기서 '종교적 권력'과 '메시아적 희생'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본문에서 가장 소름 돋는 지점은 34절과 35절의 충돌이다.
예수는 위에서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중보하고 계신데, 밑에 있는 인간들은 "너나 구원해라"며 비웃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지를 용서하고 계신데, 인간은 하나님의 무능을 조롱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서 있나? 혹시 우리도 하나님께 "내 삶의 고통에서 당장 나를 끄집어 내려달라(나를 구원하라)"고 요구하며, 정작 묵묵히 그 고통을 통과하며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의 구원'을 비웃고 있지는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