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인정과 자비에 두는 신앙

성경 낯설게 보기

by 산춘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39–43).


이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1. 비방하는 행악자: 기능적 신앙의 끝판왕 (39절)


첫 번째 행악자의 요구는 아주 논리적이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그 능력을 증명해서 우리를 여기서 내려주면 될 것 아니냐?"


*새로운 시선: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아'를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 메시아란 나의 곤경을 해결해 줄 도구일 뿐이다.


*통찰: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그의 외침은 사실 현대인의 기도와 닮아 있다. 내 삶의 고통은 제거해주되, 내 삶의 방식(행악)에 대한 성찰은 없다.

그는 예수를 보았지만, 예수의 얼굴이 아닌 예수의 손(능력)만 보았다. 결국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구원을 비웃으며 죽어간 비극적 인물이 되었다.


2. 회개하는 행악자: '당연함'의 미학 (40-41절)


두 번째 행악자가 보여준 태도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서늘하게 가르쳐준다.


*새로운 시선: 그는 예수를 변호하기 전, 자신을 먼저 정의한다. "우리는... 당연하거니와". 이 '당연함'이라는 단어가 신선하다.


*통찰: 신앙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가 아니라 당연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라고 묻는 대신, "내가 지은 삶의 궤적대로라면 지금 이 고통은 당연한 보응이다"라고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자기 의 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3. "나를 기억하소서": 시간관의 혁명 (42-43절)


행악자는 "나를 구원하소서"가 아니라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나중에"가 아니라 "오늘"이라고 답하셨다.


*새로운 시선: 두 사람의 대화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관계적 시간의 대화이다.


*통찰: 기억은? 행악자는 자신의 업적이 없음을 알았기에, 오직 예수의 '기억' 속에 머물기를 원했다. 존재의 근거를 자기 실력이 아닌 타인의 자비에 둔 것이다.


오늘(Today): 우리는 구원을 죽고 나서 가는 먼 미래로 생각하지만, 예수는 “오늘 나와 함께"라고 하셨다. 낙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있는 상태' 그 자체이다. 피 흘리는 십자가 위가 곧 낙원이 되는 역설이 여기서 일어난다.


생각해보면, 이 본문의 진짜 충격적인 지점은 지옥과 낙원의 차이는 십자가 위냐 아래냐가 아니라, 예수의 고난을 '비방'하느냐 '공유'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도 해석해본다.


좌편 강도와 우편 강도는 똑같이 처참한 고통(십자가) 속에 있었다. 한 명은 그 고통을 제거하지 못하는 예수를 비웃었고, 다른 한 명은 그 고통 한복판에 계신 예수의 나라에 초대받기를 원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이 없어지는 환경을 '낙원'이라 생각하지만, 성경은 고통의 현장에서 예수의 시선과 마주치는 그 찰나가 낙원이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나를 이 환경에서 꺼내달라"는 좌편의 외침인가, 아니면 "이 고통스러운 오늘, 주님의 기억 속에 내가 있기를 원한다"는 우편의 고백인가?


혹시 이 두 강도의 대조를 보며, 나의 삶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와 '주님께 맡겨야 할 기억'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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