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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부다페스트의 국회의사당

다뉴브 강과 코슈트 광장 사이에서 코슈트와 1956년의 시민들을 기억하며

by 빨간모자 원성필
장님 역은 단지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면 그만이고,
귀머거리 역은 온갖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 ‘비밀노트’ 중에서, 크리스토프 아고타 Kristóf Ágota






체크 출신의 밀란 쿤데라와 비교된다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 크리스토프 아고타.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비교하게 하는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이른바 ‘동유럽’의 작가이며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품을 출간하고


억겁 같은 시간

프랑스어 사전을 뒤질 수밖에 없었으며


소련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의 지배를 피해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헝가리 국회의사당에서 바라보는 석양


산쪽에 자리잡은 부다와 넓은 평지에 위치한 페스트가 있는 이 도시 자신이 가진 놀라운 역량의 대부분을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가진 도시



라는 비유에 빼앗기고 말았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다뉴브 강과 양쪽의 도시 부다와 페스트의 멋들어진 건물들과 두 도시를 잇는 서로 다른 개성의 다리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다.


이 일상적이지 않은 조화로운 아름다운 건축물들 중 가장 놀라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굴욕과 영광을 함께한 거대한 백색의 생명체가 "헝가리 국회의사당"이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관련 몇 가지

건축가 : 임레 스타인들 Imre Steindl
완공 : 1904년
스타일 : 신고딕과 신르네상스
벽돌 4천만 개, 귀금속 50만 개, 금 40kg

높이 : 96m
길이 : 268m 넓이 : 123m
방 : 691개
건물 벽의 조각품 : 242개






다뉴브강 유람선에서 보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다뉴브 강을 등지고 서있는 국회의사당 맞은편에는 코슈트 러요시 광장 Kossuth Lajos tér 이 있다.


1848년, 혁명이 유럽을 휩쓸던 격동의 해.

그 절절한 민중들 요구의 중심에서 당당했던 인물,

영웅 코슈트 러요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던

코슈트 러요시를 기리는 광장이다.

실패로 끝난 혁명이지만 헝가리인 내면의 자존감을 이끌어내고, 빛이 있기에 어둠은 지나는 것일 뿐이라는

믿음을 주었던 투사이자 헝가리인의 영웅의 기념비가 있다.

온전하게 헝가리 역사에 자리하고 있는 그에 대한 존경은

청년 벨러 바르톡의 교향시 “Kossuth"가 잘 대변하고 있다.


그는 영웅광장에도 여기 국회의사당 앞에도 당당하게 서 있다.


이 비타협적이고 정열적인 혁명가는 먼 아시아 동쪽의 지식인들에게까지 알려진다. 일본,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알려진 독립과 평등을 위한 끊임없는 저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염원하던 나라 잃은 영웅들에게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코슈트 기념비 : 공산주의 시기에 옮겨지고 파괴되었던 것을 2015년에 다시 조각해 설치한 것이다.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의 코슈트 러요시의 동상


국회의사당 주위에는 코슈트 기념비와 1956년 소련의 압제에 대항했던 혁명 기념비와 기념관 그리고 다른 주요 인사들의 3개의 동상이 있다.






1956년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Ruszkik haza! 소련은 물러가라!

자유를 외치던 마자르 인들은 1,130대의 소련군 탱크에 속절없이 갈갈이 찢겨졌다. 이 비인간적인 학살로 2,500~3,000명의 헝가리 시민들이 죽고, 13,000명이 부상당했다.


1965. 10. 25.

이 곳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사항전을 외치던 평범한 시민들은 찢긴 인형처럼 짓밟히며 거리에 나뒹굴었다.


‘내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독립이 빨라졌겠느냐?’며

독립군 때려잡았던 자신의 과거를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하던 백선엽 같은 사이코패스들이 여기 헝가리에도 있었을 것이다.


1956년 10월 25일 추모관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 부다페스트에서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59 .. 김춘수




1956년이라는 숫자와 총탄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많은 헝가리 사람들이 조국을 떠나 망명에 나섰다. 혁명에 참가했던 남편을 따라 크리스토프 아고타도 스위스로 갔다. 그녀가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스위스에서였다.


오욕의 시간은 지나고 ... 아름다운 라벤더가 핀 노을 녘 국회의사당


그리고 두 정치인의 조각상

쥴라 안드라시 Gyula Andrássy 백작

이슈트반 티사 István Tisza 백작


이들은 위대한 헝가리를 꿈꾸던 제국주의자들이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 제국이 성립된 후 헝가리는 자신들의 영토가 된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를 통치,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젠 지배자로서 피지배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8년 혁명 당시 목소리 높여 외치던 인류의 평등과 약소국의 독립에 대한 그들의 간절했던 절규는 이제 그들이 지배하는 국가들의 것이지 더 이상 과거 <식민지 헝가리>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헝가리는 1차 세계대전의 주인공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처럼 탐욕은 헝가리인들을 너무 멀리 가게 했다.



코슈트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크로아티아에서, 트란실바니아에서, 슬로바키아에서 코슈트의 꿈을 짓밟으며 웃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국가의 속성인가?

강한 자의 오만인가?




당시 외교부 장관으로 유럽 정치의 중심부로 입성한 헝가리의 입장을 대변하던 인물이 쥴라 안드라시다. 쥴라 Gyula는 라틴어 이름 율리우스 Juliu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의 이름은 헝가리의 여러 곳에 흩뿌려져 있다.


안드리시라는 이름의 도로들

안드라시라는 호텔들,

안드라시 이름이 붙은 학교들



쥴라 안드라시 Gyula Andrássy 백작
은은한 다뉴브 강의 석양
이슈트반 티사 István Tisza 백작


두 번이나 총리를 지냈던 티사 이슈트반 백작


헝가리의 현대화를 위해 경제를 활기를 불어넣는 정책을 폈으며, 같은 이유에서 유대인을 중용했다. 당시 팍스 브리타니아를 구가하던 잉글랜드의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국의 발전에 있어서 산업혁명만큼 중요했던 것이 식민지의 역할이었다. 이를 간파했던 총리 이슈트반은 부국강병의 기틀을 잉글랜드 경제 시스템의 이식과 식민지 약탈에서 답을 찾았다.


이중 제국의 굳건한 관계, 즉 오스트리아와의 우호관계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었다. 이슈트반 총리는 헝가리가 제국의 한 축으로써 유럽의 강대국 지위에 있기를 원했다. 1차 세계 대전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비극으로 끝맺은 1차 대전 패배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국화 혁명이 헝가리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 제국주의자 티사 이슈트반 총리는 암살당한다.


동상 뒤쪽, 하얀 빛깔의 사자가 뱀에 물려 절규하는 장면은 암살당하는 티사 총리를 통해 그의 죽음은 헝가리의 고통이라는 알레고리이다.






국화 혁명을 통해 헝가리에는 짧았던 사회민주주의적인 인민공화국이 건설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국가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음 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한다.


달이 참 밝다. 하얀 별처럼 떠있는 것은 새들이다. 다뉴브 강 반대편 코슈트 기념비 쪽에서 본모습
강둑에서 올려다보며 / 넋을 놓을 수밖에


바로 아래쪽 강변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모습은

부다왕궁에서

유람선에서

멀리 치타델라에서

보는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태양 빛의 보호막 속에서 낮에는 감추어졌던 섬세하고 우아함을 조명을 통해 배시시 드러내고 있다.



국회의사당 쪽에서 바라본 다뉴브강, 체인 브리지, 부다 왕궁
체인 브리지
체인 브릿지의 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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