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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닉을 통해 읽는 중세의 모습

셰익스피어, 리처드 왕, 해양 공화국 라구자 Lagusa

by 빨간모자 원성필


비올라 : 이봐요, 여긴 어디죠?
선장 : 예, 일리리아라고 하지요.
비올라 : 일리리아에서 나는 어쩌면 좋아요? 오빠는 엘리시움에 갔어요. 아마도 익사했을 테지요.

-십이야, 1막 2장, 셰익스피어, 김재남 옮김




엘리시움 Elysium

고대 그리스의 종교의 사후세계로 하데스의 죽음의 세계와는 구분되는 개념,

신과 관련된 인물들이나 영웅들이 죽은 후에 가는 낙원으로

그리스 미노아 문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어 : 샹 젤리제 champs Élysées





두브로브니크 올드 타운으로 가기 위해 건넌 투즈만 다리




달마치아, 일리리아라고 부르는

발칸반도의 해안 도시,

희곡 <십이야>의 배경이 된 도시,

중세엔 라구자 Lagusa로

1909년부터는

두브로브닉 / 두브로브니크로 알려진 도시.


셰익스피어는 이 곳에 와 보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십이야>를 읽어 보면 배경은 일리리아(라구자)라고 하면서도 도시에 대한 어떤 묘사도 찾을 수 없다. 가끔 ‘일리리아’, ‘난파’라는 단어가 등장할 뿐이다.


마치 베네치아에 가보지 않고도 베니스의 상인을 집필했던 것처럼 ...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당시 잉글랜드에는 유대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유대인' 샤일록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가적 상상력은 경탄할만하다.





알고 가기

라구사 공화국 1358 - 1808
(라틴어: Respublica Ragusina)
1358년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
수도 : 라구사(두브로브니크) / 라우스 섬
언어 : 1492년까지 라틴어가 공용어. 크로아티아어, 달마치아어도 사용

아래 국가들 지배 아래 자치권을 가졌던 봉신 국가
베네치아 공화국 (1205–1358)
헝가리 왕국(1358–1458) : 완전한 자치
오스만 제국 (1458–1806)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1684–1806)


1458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이 되었으며 그 대가로 자유를 얻어냈다.


1684년

공화국은 자국 영토에 대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주권도 인정했다.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에 조공을 바쳤지만 다양한 거래 도시들에서 두 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게다가 면세로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이런 계약이라면 대단한 특혜였으며 경쟁 상대 었던 베네치아보다 유리한 면도 많았다.


특히 16세기 이후 대서양 중심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반대급부로 지중해 중심의 무역을 하던 해양 공화국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새시대의 새로운 트랜드를 따라잡지 못한 베네치아 역시 피할 수 없는 쇠락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반면 라구사는 오스만 제국의 흑해 도시들 및 에스파냐, 제노바, 영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신대륙, 유럽 서부, 북부와의 물품 거래가 자유로워지면서 번영을 이어가며 전성기를 맞게 된다.


1588년 영국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무적함대를 지원함으로써 에스파냐로부터 믿을 수 있는 교역대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대서양을 통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스페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되어 지중해에서의 상업활동이 한결 수월했다.



스르지산에서 바라본 구름 속 로크룸 섬




3차 십자군 전쟁을 마친 사자심왕 리처드 1세 Richard the Lionheart는 귀국을 위해 잉글랜드로 향하는 귀국길에 풍랑을 만나 난파당해 로크룸 섬에서 구조되었다고 한다.


<십이야>가 바로 이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이다.


사나운 풍랑에 하얗게 질린 사자심왕 Lionheart(?)은 만약 여기서 살아난다면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도착한 곳에 신을 위한 교회를 짓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로크룸 섬에 도착한 리처드 왕은 그곳에 약속했던 성당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두부로브닉 사람들의 설득으로 두브로브닉에 성당을 짓도록 하고 나중에 자금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편 바다가 무섭기도 하고

배를 이용한 이동 비용 충당이 어려워지자 육로로 귀국을 서두르게 되는데...



블라호 성당 벽면 부조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몸값의 지불해야 했다. 왕의 귀환을 위한 자금 마련은 동생인 존 왕의 몫이 되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왕이 그것도 먼 외국에서 싸움질만 하고 다녔다. 그런 그가 사로잡혔다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겠다고 한다면 받아들일 국민들이 있을까? 무차별적이고 부담스러운 세금은 귀족과 시민들의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결국

귀족들에 한정된 내용이지만 통치자 개인 의견만으로 세금을 새로 만들거나 올릴 수 없다는 내용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 왕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진 것이다.


어렵게 마련한 리처드의 몸값으로 신성로마제국은 비엔나를 보호할 수 있는 성벽을 건설했다. 그 성벽이 있었던 곳이 현재 예술사 박물관, 호프부르크, 시청사, 오페라 하우스 등의 랜드마크들이 있는 비엔나의 유명한 '링 거리 Ringstraße'가 되었다.



1. 풍랑을 만난 왕 -

2. 육로 이동을 선택 -

3. 사로잡힌 왕 -

4. 몸 값의 지불을 위한 증세 -

5. 귀족과 시민들의 반발 -

6.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1215년) 서명


이런 걸 나비효과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먼 곳에서의 풍랑이 잉글랜드의 국가 통치 메카닉에 영향을 미쳤다.





해양 공화국의 위대했던 두브로브니크를 증명하는 구항구, 정면에 보이는 검역소와 스르지 산



해양 공화국 Maritime republics


11세기 유럽 경제 발전과 더불어 지상 운송의 불편함과 위험으로 인해 지중해 연안의 상업적 해상운송이 중요해졌다.


로마의 거대한 보호막에서 벗어난 도시국가들 중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아말피, 라구자 등은 스스로를 지키고 지중해의 무역망을 최대한으로 확대하기 위해 함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전쟁과 동맹을 수시로 바꾸며 경쟁하며 성장했다.


해양 공화국들은 유럽이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 돈이 기초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서는 추진력이 되었다. 그리고 금화를 이용하면서 자본거래와 그 기법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해양 공화국은 형식적으로는 자신들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나 피사와 제노바를 제외한 도시국가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속해 있었다. 도시가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상인계급이 권력을 가지고 되었다. 부를 바탕으로 강력한 해군을 운영할 수 있었던 그들에게 더 이상 그들을 억압할 상위계급이 없었다. 더 열심히, 한 번 더 움직이고 노력하는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십자군 전쟁은 이 해양 공화국들이 성장, 발전에 불쏘시개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라구자 공화국의 경우

알함브라 칙령(1492년)으로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떠났던 세파르딤의 유대인들이 1544년 이주해 오면서 경기 활성화에 큰 도움이 도움이 되었다.





해양 공화국들의 위치 / 위키피디아




가장 강력했던 세력이 베네치아와 제노바였지만,

가장 오래까지 남아있던 해양 공화국은

라구자 Lagusa었다.


주요 해양 공화국들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아드리아해의 라구자 등 좁은 지역에 모여있었지만 그들이 지중해를 벗어나 다양한 나라와 도시들과 거래를 하고 식민지도 가지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영국 심지어는 현재 벨기에의 브뤼헤에서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쪽 크림반도의 카파 Caffa를 거쳐 아조프해까지

지중해 유럽 주요 도시와

대서양을 면하고 있는 모로코의 서부 항구들 살레 Salé, 사피 Safi,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주요 수입품으로는

후추를 비롯한 향료와 비단, 도자기, 차, 면직물 등 동방이 비교 우위에 있는 물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팔 상품이 마땅치 않았던 유럽에서는 은으로 상품 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때부터 유럽은 동방에 대한 만성적자에 시달리게 된다.


유럽의 무역적자 타개책
1545년 이후부터 1800년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13만 7000톤의 은(銀) 중에서 6만 톤(44%)은 청나라에 유입되었다. 무역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서양 열강이 찾아낸 것이 아편 밀매. 1840년 아편전쟁은 청나라 정부가 아편무역을 허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은 세계 최초의 <<거대 마약 생산 판매조직>>이었다.


라구자 공화국은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들 뿐만 아니라

발칸지역의 육로를 잇는 해양 공화국이었다.


육상으로는

모스타르(BiH) - 사라예보(BiH) - 베오그라드(세르비아)를 연결하는 북동 교역로부터

프리슈티나(코소보) - 니시(세르비아),

프리즈렌(코소보) - 소피아(불가리아) - 바르나(불가리아) 또는 콘스탄티노플을 잇는 중부 교역로

테살로니키(그리스)로 직접 연결되는 남부 교역로까지




플라차/스트라둔 거리... 석양의 두브로브닉 / 두브로브니크




복지 공화국


13세기, 라우스 섬과 그 맞은편을 양분했던 습지 위로 석회암을 보도블록으로 사용한 300m 길이의 넓은 도로를 만들었다. 이 길이 플라차(Placa) /스트라둔(Stradun)이다.


이로 인해 도시는 새로는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로마의 법률과 이 지역의 관습을 참고한 자체 법률이 생겨났다. 법률에는 도시계획과 검역규정을 포함한 공공 위생 관련 법령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292년에 있었던 화재 이후 항구를 포함한 도시 내부가 새롭게 계획되었으며

1301년에는 의료 서비스가 시작됐다.

1317년에는 현재까지 이용되는 약국이 문을 열었고

(현재도 운영되는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

1347년 요양원

1377년 최초의 검역 병원(Lazarete)


1348년, 흑사병이 도시에 퍼졌다. 아마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두브로브닉에서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1418년에는 꽤나 수지맞는 사업인 노예 매매를 금지했다.

1432년에는 고아원이 문을 열었고
1438년엔 11.8km 길이의 물 공급 시설이 설치됐다.

그 외에도 15세기 동안에 시민 건강을 돌보는 체계와 무상 공교육 제도까지 수립되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본 오노프리오 분수 / 수도 시스템


600년~700년 전에 복지정책?


무상교육, 고아원, 양로원, 환경개선을 통한 쾌적한 도시 운영, 노예 매매금지 등 당시로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정책들을 펼쳤다. 시민이 주인이 되었을 때, 세상이 아름답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중세시대에 입증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럽의 중세는 인류 역사성 가장 반동적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오늘날에도 비용, 이해관계자들 및 다양한 내외 변수로 도입이 쉽지 않다. 가까운 예로 시급을 1만 원으로 올리는 문제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듯싶다.


허투루 사용되던 비용을 공화국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시민들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들 스스로 내가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깨어있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가 가장 오랫동안 번영과 자유를 누리는 해양 공화국이 될 수 있는 배경이 아니었을까?


1426~1808년 사이의 두브로브닉/두브로브니크 영토/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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