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체치온에서 만난 클림트
왜, 베토벤이었을까?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교향곡 9번으로 내면의 자유를 구체화시킨 천재는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던 후배들에게 최고의 이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가 원했던 합창 코러스 부분 제목은 환희의 송가 Ode "An die Freude"가 아니었다고 한다.
자유의 송가 Ode "An die Freiheit"
베토벤이 간절히 사용하고 싶었던 제목이지만 당시 사회에서 <자유 Freiheit>는 매우 조심스러웠던 표현이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이라고 일갈하던 제체치온의 동지들에게
베토벤은 선구자였을까?
아니면
‘예술의 신’이었을까?
그렇다면 제체치온은 자유의 알레고리일까?
‘사회의 몰이해와 고독과 싸운 베토벤’이라는 주제로 1902년, 제체지온 Secession의 14번째 전시회가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는 <몰이해>로 내쳐졌었다고.
그리고
오늘의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어있다.
베토벤 프리즈 Beethovenfries
몇 년간 무심하게 지나다니다 드디어 제체치온에 다녀왔다.
나의 관람 노트에서
일을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던 벨베데레나
놀라운 르네상스의 작품들과
감탄을 자아내는 바로크를 만나던 ‘예술사 박물관’,
광고 문구처럼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라는 ‘알베르티나’,
에곤 실레, 클림트, 알프레드 쿠빈의 ‘레오폴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앤디 워홀의 ‘무목’ 보다
늘 하위에 있었던 ‘제체치온’.
수없이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면서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클림트의 작품이 있다는 어렴풋한 기억만이 저편에 아득하게 있었다.
다른 관람객들을 따라 내려갔다.
좁은 문을 지나 드디어 만난 베토벤과 클림트
세 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파리의 오랑주리에서 마주했던 낯선 보랏빛 기억은 황금의 해피앤딩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어디부터 봐야 하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이 많은 여백은 또 무엇인가?
어떻게 찍어야 할까?
궁금증은 한여름 노을녘 귀찮게 얼굴 주위를 윙윙거리는 하루살이들보다 더 많았다.
4개의 주제?
주저앉아 카탈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하루를 통째로 사용해도 상관없는 날이다.
제체치온 홈피와 위키피디아, 블로그들을 찾아 읽어나갔다.
문득 아릿한 저림이 배 아래쪽부터 올라온다. 이 저림은 전율의 전주다.
벽을 따라 흐르는 정령들의 아름다운 물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통주저음처럼 화폭의 전체를 이어주는 정령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왼쪽부터.
오른쪽 벽이 처음이어도 상관이 없다. 클라이맥스를 먼저 본다고 감동이 덜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나는 첫 번째 주제
황금의 기사와 무릎을 꿇고 도움을 갈구하는 나약한 인간들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알레고리?
추상적인 의미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바꾸는 것으로 <우화>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악을 응징하려는 의지로 크게 부릅뜬 눈의 황금의 기사가 있다. 그 위로 두 명의 여인이 야망과 연민을 상징한다.
월계관을 들고 거만한 눈빛의 야망
두 손을 모아 고통을 쓰다듬으려는 연민
강력한 기를 발산하는 황금의 기사와 클림트스럽게 장식된 디자인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투구 뒤 부분의 디자인,
기사의 앞과 뒤를 장식하는 서로 다른 문양들
이어 드러나는 “적대적인 힘”인 사악함
두 번째 주제다.
티폰 Typhoeus -털북숭이, 푸른 날개, 뱀을 닮은 하체를 가진 괴물-과 그의 딸들인 고르곤들이
벽면 전체를 휘감은 “적대적인 힘”
황금의 기사와 티폰은 서로를 노려 보고 있다.
고르곤 자매들 위로는 질병, 광기, 죽음의 알레고리들이 자리 잡고 있다.
괴물의 오른쪽엔
붉은 머리카락의 음란,
금빛 머리칼의 욕망,
배부른 방종의 알레고리가 상징적으로 모여있다.
행복의 파괴자들이다.
그리고 왼쪽의 야위고 위축된
비탄에 잠긴 고뇌의 알레고리
버려진 자들의 잔인한 고문인 ‘희망’은
오른쪽 위로 살짝 등장하는 선한 정령의 머리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행복의 알레고리가 살그머니 눈감고 나타난다.
벽면의 위쪽에 행복의 정령들의 배치를 통해
찾지 못할 뿐,
행복과 희망은 늘
인간들의 곁에서 맴돌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자유! 베토벤 프리즈, 2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