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판단해서 부끄럽고 미안하다
새벽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 한 판만 더 하고 꺼야지 이어가던 게임은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한 판이 끝나면 홀린 듯 다음 판을 시작했다. 계속된 패배로 감정은 격양돼 있었고 작은 자극에도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마지막판 마저 패배한 나는, 다음날 아르바이트를 가야 했기에 조금은 떨리는 손을 붙들고 겨우 게임을 종료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아르바이트, 제출할 보건증을 뽑아야 해서 프린트기를 켰다. 콘센트에 꽂고 버튼을 눌렀지만 파란불이 나와야 할 프린트기는 이내 우우웅 소리를 멈추고 빨간색 빛을 내뿜었다. 프린트기는 도로공사 중 차량의 진입을 막기 위해 인부가 흔들고 있는 빨간 경광봉처럼 나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다른 매체에서 자주 봤던 것처럼, 지금까지 십수 년 프린트기를 사용해 온 경험상 프린트기는 이유 없이 말썽을 부릴 때가 많았다. 이리저리 집을 누비던 귀여운 고양이가 갑자기 주인이 먹는 식탁을 확하고 엎어버리는 것처럼. ‘기계는 원래 맞아야 해.’ 몇 번 때려주고 전원을 껐다 켰다. 옆면을 툭툭, 윗면을 툭툭 프린트기를 두둘겼다.
새벽 열두 시 삼십 분이 넘어갈 때까지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우우웅’과 ‘툭툭’뿐. 그사이 프린트기를 두둘기던 소리는 점점 커졌고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 때문인지 얼굴은 점점 불콰해졌다. 프린트기 뚜껑을 열고, 잉크를 다 꺼내서 닦아보기도 흔들어 보기도 했지만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빨간 경광봉은 끝내 꺼지지 않았다.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프린트기 관리’ 앱을 실행시켰다. 커다란 X 표시와 함께 ‘폐토너통 교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세상이 나한테만 가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대학교 팀플을 할 때 우리 팀원만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 학교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똑같이 떠들었는데 선생님이 나만 더 혼낸다고 느껴질 때. 왜 나만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건지, 왜 나만 혼내는 건지 억울하고 화가 나는 순간들. 묻고 싶다. 저런 놈들이라고 정의 내린 저 사람은 나를 무어라 정의 내릴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 과연 그 팀원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나만 혼내는 선생님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비정상인이라 생각하는 저 눈에 비친 나는 정상인일까, 나에게만 가혹한 선생님의 눈에는 나만 말쌩쟁이일까. 모든 사람은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각자가 가진 시각으로, 각자가 가진 세상으로. 참 이기적이게도 사람의 시야는 매우 좁아서 보고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는 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달라진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뇌에서 생각하는 대로 멋대로 바라본다. 팀플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는 저 사람의 눈에 나는 말만 많고 투덜거리면서 똑바로 하지도 않는 사람일 수 있는 것처럼, 유달리 큰 내 목소리가 선생님 귀에 특별히 더 거슬렸을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역사도 모르면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섣불리 판단하고 섣불리 판단을 내린다.
잉크를 모두 꺼내 차곡차곡 쌓았다. 서로 섞이지 않게 잉크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빠지는지도 몰랐던 프린트기 왼쪽에 붙어있는 폐토너통을 힘으로 뽑았다. 비닐봉지에 넣고 흔들자 작은 봉지는 금세 검정 가루로 가득 찼다. 안에 들어있던 내 손과 손목도 검정 잉크로 물들었다. 프린트기를 산 이후 한 번도 청소해 주지 않았던 ‘폐토너통’. 그 안에 지금까지의 잉크 찌꺼기가 가득 차 있었다. 흔들고 흔들고 한참을 흔든 후에야 폐토너통은 모든 찌꺼기를 토해냈다. 물티슈를 가져와 깨끗이 닦고 잉크를 다시 집어넣었다. 흔들거나 세게 넣지 않고 다치지 않게 조심히 넣었다. 잉크를 모두 꼽고 프린트기 뚜겅을 닫자 공사가 마침내 끝났는지 빨강 경광봉은 사라져 있었다. 프린트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건증을 출력해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