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일이 언제였지
앱으로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십 분가량 남았다고 뜨고 있다. 천천히 걸어가도 4분 정도 걸리니 슬슬 나갈 채비를 한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거울을 확인한다. 머리를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여자친구를 보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앞뒤로 거울이 달린, 그래서 내 앞뒤를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는 이곳. 짐을 내려놓고 사진도 한 방 찍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조금 걷다 앱을 확인하니 칠 분가량, 여유롭다. 미리 지갑을 꺼내려 가방을 뒤지는데, 없다. 손에도 가방에도 지갑이 없다. 주말이라 그런지 다음 버스는 26분 뒤, 몸을 틀어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뛰어갔다. 있는 힘껏 뛰었다. 정돈했던 머리는 바람에 휘날렸고 땀 나지 않으려 조심했던 몸은 어느새 후끈 달아올랐다. 다행히 제자리에 있는 지갑을 집어 들고나와 앱을 확인하니 2분 30초. 다시 뛰기 시작했다.
뒤돌아 뛰기 시작했던 곳에 다다르자, 발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이 나고 있었고 등은 금세 축축해졌다. 여자친구에게 헝클어진 머리와 냄새나는 몸으로 갈 수 없었지만 일단 뛰어야 했다. 버스가 몇 분 남았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뛰었다. 버스 정류장 앞 횡단보도에 도착해 고개를 돌렸다. 버스는 신호등 아래 맨 앞에 서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긴장을 놓자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르게 쉬어지지 않는 숨, 예민하게 느껴지는 심장박동, 뒷머리를 타고 등으로 흐르는 땀.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숨을 골랐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참 아름다웠다. 찜기에 들어 있는 만두가 되는 여름이지만 그럼에도 여름의 좋은 점은 하늘과 풍경이 참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름답다.
좀처럼 줄지 않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린 적이 언제였지. 온몸에서 땟국물이 나오도록 신나게 뛰어놀던 어린 시절, 매년 찾아오는 운동회 때 반 대표로 나가서 흰 선을 끊었던 시절. 성인이 되면서 걷기 시작했던 것 같다. 뛰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신호임에도 걸었고 다음 신호에 건넜다. 뛰는 것을 점차 멀리했다. 버스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몸보다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었을까. 가슴 뛰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고 심장이 뛰는 일은 잊은 지 오래였다.
얼마 전(사실 반년의 시간이 넘었지만 아직 얼마 전 같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늘 '재승아' 하며 불러주던, 정작 나는 나를 보잘것없다 생각했지만, 당신의 눈에는 언제나 최고였던 '재승이'. 할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다급한 전화에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했다. 달리면서도, 눈에 핏발이 서고 벌게진 엄마의 눈을 보면서도 이질감이 들었다. 정신이 없었고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똑바로 알 수 없었다. 그저 달리며, 생각 없이 이 층으로 달려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품에 안겨 축 처진, 당신은 뼈가 없는 해파리처럼 축 처져 있었다. 힘없이 감긴 할아버지의 눈, 샛노란 당신의 얼굴과 땅에 끌린 팔과 다리. 멍하니 보고 있는 나를 아빠가 깨웠다.
‘119 전화해.’ 손을 더듬으며 전화를 걸었다. 내가 무어라 했었나. 그도 무어라 했다. 심장압박을 했다. 당장 해야 할 것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군 시절 배웠던 심폐소생술을 몸이 기억했다. 할아버지를 똑바로 뉘고 왼쪽에 무릎을 꿇고 섰다. 명치 위쪽에 손바닥을 올리고 강하게 눌렀다. 실제 사람 갈비뼈를 눌러본 적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눌렸다. 단단한 갈비뼈는 푹푹 잘도 놀렸다. 우드둑.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몸을 움츠렸다. 후에 알았지만,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정말 단단한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그 생생한 느낌. 나는 계속 압박을 가했다. 부러지고 계속 파여도 쉬지 않고 누르고 압박했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갈비뼈를 부수었다.
여자친구를 세 번째로 만나던 날. 그날은 서현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로 알아 간지 도 어언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녀를 좋아하고 있던 나는 언제 어떻게 마음을 고백해야 할지 생각의 물레방아에 고통받고 있었다. 지하철역을 올라가 광장 시계탑으로 올라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탔다. ‘오빠!’ 여자친구 그러니까 당시에는 아직 여자친구가 되기 전인 그녀가 뒤에 서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데 뭔가 달라짐이 느껴졌다. 눈빛. 오늘 그녀의 눈빛은 내가 처음 보는 눈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데이트는 아니지만 학교에서 같은 동아리를 하며 얼굴은 자주 봤다), 사슴같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이라는 표현이 들어맞게 그 눈에는 무언가 담겨 있었다.
밥을 먹고 나와 카페에 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각자 우산이 있었지만 ‘같이 쓸래?’ 먼저 물었고 다행히 긍정의 답이 왔다. 크지 않은 우산 속 우리는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살이 닿지 않을 정도로 붙어 걸었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카페까지 향하는 약 10분의 거리가 길게 느껴졌다. 한참을 걷다 도착했는데 반대로 왔음을 깨닫고 지도를 보고 오지 않은 내가 미워졌다. 비도 많이 오는데 괜히 더 걷게 해서 어쩌냐고 미안하다고 했다. 상황에 맞지 않게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해맑은 얼굴은, 정말 행복하다고 웃고 있는 순수한 웃음은 터질 듯이 팽창해 있는 풍선을 바늘로 톡 건드려 마침내 터뜨렸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그녀를 보내기 전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지나가는 사람을 뒤로한 채 용기를 냈다.
‘나랑 만날래?’
그녀에게 마음속 잡초를 따서 전해주었다. ‘뭐라고?’ ‘나랑 만나자고!’ ‘좋아.’ 잡초가 아니라 꽃이었나 보다.
뛰고 싶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싶어졌다. 할아버지의 가슴을 뭉갰던 것처럼, 여자친구가 수줍은 마음을 받아줄 때 터질 듯 심장이 뛰었던 것처럼. 달리고 달리다 넘어져 무릎이 까져 빨간 약을 발라야 할 때까지, 한밤중에 정류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 시원하게 달리는 버스처럼. 신호가 바뀌고 버스가 출발하는 게 보였다. 가방에 들어있는 지갑을 꺼내 버스에 오를 채비를 했다. 기다리던 버스 문이 열렸고 시원한 에어컨 냉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아 노래를 틀었다. 편안히 숨을 쉬었고 심장박동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편한 몸과 다르게 마음은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