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별게 아니다

-사랑도 모르는 주제에

by 성성이

사실 저는 유물론자라 우연, 인연, 종교를 크게 믿지 않습(물론 존중합니다!)니다. 또 남을 존중하고 이해하지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독불장군이기도 하죠. 제가 납득이 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말은 결코 고막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제 마음과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죠. 중요한건 과거형이라는 사실입니다. 강력한 유물론자인 저의 생각을 망치로 유리부스듯 손쉽게 깨부순, 세상에는 인연이라는 것이 정말 있나봅니다. 분명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데, 유달리 편했던 그 사람 덕분이죠.


우연히 만났고 우연히 알게된 한 여성분이 있었습니다. 친한 형과 아는 동기놈이랑 장학금을 목적으로 신청한 대학교내 프로그램을 하다 만난 분이었죠. 그분은 우리 모임의 멘토였고 반드시 한번은 만나야했기에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저를 잘 아는 형이 저에게 처음을 권유해왔습니다.

"완전 너 스타일인데? 연락 한 번 해봐."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저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고 숨겨둔 마음을 고백하리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방금 처음 본 이성에게 연락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가 필요했죠.

"에이 뭘 연락해요. 됐어요."

얼버무리며 대화를 일단락지었지만, 뭔가 찜찜한 느낌이 마음 한켠에 남아있었죠. 그래도 시험기간이었기에 도서관에 틀혀박혀 공부하다보니 자연스레 잊을 수 있었죠.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다 막혀서,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깨지는 내가 약해지는 순간이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아까 모임 때 그분의 모습이, 형이 알려준 그분의 연락처가. 잠시 쉰다는 핑계로 휴대폰을 들고 옥상 테라스로 올라갔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연락을 보냈죠. 프로그램 관련 문의가 핑계였습니다. 의미 없는 그러니까 궁금하지도 않은 몇가지를 질문하다 나도 모르게 '잠시 만날래요?' 마음을 전했습니다. 라이터의 세기를 끝까지 민 뒤 부싯돌 휠을 강하게 돌렸을 때처럼 강한 불꽃이 튀어나왔습니다. '금방 나갈게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했습니다. 기숙사에 사는 그녀는 귀여운 핑크색 모자를 눌러쓰고 내려왔죠. 우리는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고 마치 당연히 만나기로 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걸었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그녀를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도서관에 돌아와 다시 연락했습니다.

"내일 밥먹어요."

"맛있는걸로."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면 반드시 손을 잡아주어야 했던 그녀, 커다란 초밥을 자르지도 않고 한입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 학교로 돌아와 높기만한 대학교를 걸으며 함께 웃던 그녀. 처음은 늘 새롭고, 새롭기에 더 강렬합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갔고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준 감사함. 별 목적 없이 신청한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그 사람과, 드라마 같은 과정으로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한 시간 가량을 그 사람과.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사랑은 그 거대한 대서사시는 도저히 한 줄로 정의내리기가 힘드니 말이죠.

맞습니다. 사랑은 대서사시라 생각해 숭고한 것이라 생각해왔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대가 없는 사랑,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어주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만이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제가 느낀 마음도 그때의 분위기도 공기의 냄새도 사랑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숨김 없이 굳이 나를 숨길 필요없는 솔직한 마음. 사랑 그 대단한 마음은 반드시 대단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닌 마음도, 그저 생각나고 보고싶은 그 작은 마음도 분명 사랑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 그거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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