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파괴하는 자기방어
처음 겪는 순간, 감각이 예민해지는 순간. 어쩌면 보들레르가 말한 ‘회복기 환자’가 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 밝아오는 해는 집에 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증폭시켰고 밀려오는 졸음과 연신 감기는 눈꺼풀은 ‘짜증’이라는 감정을 폭발시켰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일하는 순간임에도, 내 의지로 내가 하겠다고 기꺼이 지원까지 한 아르바이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내 앞에 서 있는 한 남성은 토요일 아침부터 술에 취해 잔뜩 불콰해진 얼굴로 나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8월의 여름은 무섭게도 더웠고, 모래폭풍처럼 무섭게 밀려오는 짜증은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갔다. 112. 수화기를 들고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네 여기 ** 편의점인데요. 술 먹고 난동 피우는 사람이 있어서..’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자 텅 빈 편의점이 나를 반겼다. 그는 사라졌다.
처음으로 혼자 맞이하는 열여섯 평 남짓한 작은 프렌차이즈 카페 공간. 8월의 여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깥세상은 살이 익는 듯한 더위가 펼쳐져 있다. 마치 온 바닥이 뜨겁게 달궈진 거대한 프라이팬 위 타닥타닥 익어가는 계란프라이처럼. 열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주문 전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배달 주문, 오더 주문, 키오스크 주문. 오전 내 시간당 만 원도 팔까 말까 해서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나를 찾는 손길들. 사실 내가 아니라 시원한 음료수와 더운 몸을 식힐 찬기를 찾는 다급한 마음들. 익숙하지 않은 레시피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만들다 보니 시간은 배로 걸렸다. 쏟아지는 관심, 몸을 찔러오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눈길들. 마음은 급해지고 손은 떨려왔다. 그때 걸려 오는 전화. 처음이었다. 여전히 떨리는 손과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방금 주문한 사람인데요. 라떼를 시켰는데 아메리카노가 왔어요. 어쩌실거죠?”
“아 죄송합니다. 금방 해서 다시 보내드릴게요.”
“네 아메리카노는 다시 돌려보낼게요.”
“아 괜찮습니다. 아메리카노는 그냥 드시면 됩니다.”
“됐어요. 먹지도 않는데 뭘.”
어느새 늘어난 눈초리. 원두를 갈고, 온 힘을 다해 원두를 누르고 커피를 추출한다. 몸이 긴 플라스틱 컵에 얼음과 물을 가득 담고 작은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따른다. 믹서기 통을 가져와 우유를 담고 무어라 쓰여 있는 파우더를 찾아 이것저것 넣고 간다. 밀린 주문을 쳐내고 나니 30분 정도가 지났다. 서둘러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보내드리려고 하는데 귀찮게 해서 죄송하지만, 같은 메뉴로 한 번만 더 주문해 주시겠어요? 기사님을 불러야 해서…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금액 환불해 드릴게요.”
“네? 주소가 아니라 계좌를 알려달라고요? 계좌는 왜요?”
“아 금액 환불해 드리려고요.”
“하아. ***-***…”
“혹시 계좌번호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아… 못 들으셨어요?”
수화기를 내려놓고 조금 지나자, 주문 전표가 올라온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라떼 큰 사이즈 두 잔. 원두를 갈고, 온 힘을 다해 원두를 누르고 커피를 추출했다. 큰 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우유를 붓고 작은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따랐다. 손이 떨려 커피가 조금 흘렀다. 뚜껑을 닫고 랩을 씌운 뒤 다시 배달을 보냈다. 찾아온 적막. 열여섯 평 남짓한 이 작은 공간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가만히 앉아 밖을 바라보는 데 몸과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른미역을 한 움큼 집어먹었나. 비겁한 자기방어는 물에 닿으면 순식간에 불어나는 미역처럼 텅 비었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말하는 태도가 왜 저 모양이지, 말을 왜 이렇게 예의 없이 하지. 글을 썼다. 늘 들고 다니는 작은 메모지를 펼쳐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작은 메모지는 금세 채워졌고 비로소 떨리던 몸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한껏 말려있던 몸은 곧 꼿꼿하게 펴졌다. 알고 있다. 비겁한 변명, 남 탓으로 돌리는 무례함, 상대가 나쁘다고 단정 짓는 근거 없는 일반화. 내가 잘못을 저질렀으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했으면서.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가 떠올랐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삭이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원래 이렇게 구성된 시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문장과 흐름으로 재배치한,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시. 윤동주는 늘 부끄러워했다.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이렇게 주욱 글이 써진다는 것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것을. 다행인 것은,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부끄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열여섯 평 남짓한 한적한 공간에서 쉽게 글이 씌어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마는, 나에게 진짜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전화한 그가 나쁘다고 단정 짓고, 몸이 떨리도록 그를 저주하고, 그럴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배부른 돼지처럼.
스무 살의 부끄러운 기억을 이제야 고백한다. 사실 편의점의 그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난동을 피우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카운터에서 얼음 컵에 음료를 부으려고 했었고 그 행동은 내 심기에 거슬렸다. 음료를 쏟는다면 치울 것이 산더미였기에, 눈은 지금 당장이라도 감기기 직전이었기에, 아침부터 편의점을 찾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서 튀어나온 용기였을까. 나는 짜증을 전혀 숨기지 않고 툭, 그저 툭 내뱉었다. ‘아 저기 가서 하세요.’ 나는 그를 무엇으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던 걸까. 신고하는 대상이 과연 그가 맞았을까. 수화기를 들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까지 손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침 열시, 다음 사람과 교대하고 버스를 탔다. 잠깐 버스를 기다리는데 땀이 주욱 흘렀다. 집에 돌아와 찬물로 샤워하고 텅 빈 배를 채웠다.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웠고 김치와 계란 프라이를 반찬으로 먹었다. 숟가락을 잡은 손가락은 계속해서 떨렸지만, 다행히 입으로 잘 들어왔다. 머리를 완전히 말리고 밝고 따스한 태양을 차단하고자 암막 커튼을 끝까지 쳤다. 방은 순식간에 차갑고 깊은 동굴처럼 어두워졌다. 나는 한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보냈던 불과 몇 시간 전 편의점을 떠올렸다. 에어컨을 틀었음에도 후끈후끈한 더위, 땀이 흘러 끈적거리는 살결, 밀려드는 술 담배 그리고 콘돔을 사는 끝없는 사람들. 더위에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든 나는 아주아주 나쁜 악몽을 꾸었다. 아주아주 뚱뚱하고 게으른 돼지로 변신해 살이 찢기도록 채찍으로 맞는 무서운 꿈을. 피가 나고 아픔에 소리쳐도 전혀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그 신념이 담긴 손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