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퍼

-위험을 만들어내고 위험에 부딪히는 일

by 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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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셔 눈을 뜬다. 어느새 떠오른 해가 온 몸을 비추고 있다.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전화를 끄고 무의식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켰다. 릴스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무표정으로. 가끔 피식거리며 입꼬리가 올라간다. 십 오 분 정도가 지나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다. 몸을 일으키는 게 여전히 힘들다.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눈도 잘 뜨지 못한 채 온몸이 굳어있는 내가 보인다. 얼굴에 찬물을 냅다 담그니 정신이 차려지는 듯 하다. 냉장고를 열고 찬 물을 꺼낸다. 꿀꺽꿀꺽. 지난 몇 시간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던 식도를 지나 차가움이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눈이 다시 무거워지지만, 꾸역꾸역 텍스트를 머리에 담는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여덟 시쯤, 운동을 하러 간다. 고여 있던 몸에 피를 돌리고, 무거운 중력을 이겨내며 상쾌해한다. 집에 돌아와 끈적한 몸을 씻어내고 밥을 씹으며 비어있던 위장을 채운다. 크게 한술 뜨니 기분은 배가 된다. 시원한 스터디카페로 들어가 일정을 정리한다. 밀려있던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을 쓴다. 나의 하루, 반복되는 하루, 익숙한 하루.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글처럼.


240kg을 들다가 운동 메이트가 300kg을 해보자고 말을 꺼냈다. 300kg.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무게였다. 무려 60kg을 한 번에 증량하다니, 무서웠다. 무릎 관절은 괜찮으려나, 혹시 들다가 깔리면 어쩌려나 불안부터 다가왔다. 돌아온 내 차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힘껏 밀었다. 밀렸다. 아니 생각보다 쉽게 밀렸다. 나는 해보기도 전에 눌려있었다. 무서워하고 있었고 숨어있었다.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샤워하고 다시 잠에 드는 일. 어느새 반복되던 하루 속 안주하고 있었다. 하루를 잘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어떤 변화도 없이 일정을 소화해 내는 것에 뿌듯해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늘 240kg의 무게를 버티다 보니 나에게 가장 무거운 한계는 240kg으로 점점 굳어갔다. 나는 그 정도의 사람으로 굳어져 갔다.


300kg. 무려 앞자리가 바뀐 만큼 가히 쳐다도 볼 수 없는 벽. 두려움을 이겨내고 가까이 다가가니 그 벽은 수풀로 이뤄진 덩굴 더미였다. 두 눈을 감고 덩굴 사이로 들어갔다. 높고 두꺼워 보였던 벽을 통과했다.

가만히 있었다면 평생 반복되기만 했겠지. 오늘은 240이 무겁다고, 오늘은 240이 가볍다고 생각하며 평생 240이라는 한계를 책정해 두고 있었겠지. 나를 내가 제한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했겠지. 파도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이어 나가는 동안 누가 바람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운이 좋게도 그런 바람을 만난다면 천운이겠지. 하지만 그런 기회가 몇이나 있으랴. 인생은 길고 바닷속 깊게 깔린 물을 뒤섞을 파도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 배가 아니라 맨몸으로 바다를 헤쳐나아가더라도, 설령 내 몸의 100배가 넘는 파도가 닥쳐올지라도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그 파도를 이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다. 파도가 무서운가. 정말 무서운 건 바닥에 쌓이는 모래와 자갈이다.


험난한 파도를 즐기고, 무서운 파도를 찾아다니는 서퍼. 조금이라도 균형을 잘 못 잡았다간 바로 위 파도에 잡아먹힐 서퍼들. 파도를 피하지 말자. 대신 파도에 올라탈 작은 보드를 준비하자. 잡아먹히는 게 무서워 하류에 머물러있는 배부른 돼지 같은 삶. 나를 집어삼키는 파도에 올라탈 작은 보드 위에서 높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 나는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 오늘부터 작은 보드를 만들어야겠다. 설령 그것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어 금세 부러질지라도 나는 보드를 만들어 갈 것이다. 오늘보다 더 단단하게, 내일보다 더 단단하게. 파도를 이겨낼 유일한 방법은 파도를 즐기는 것이니까. 집어삼켜지면 목숨을 빼앗기는 파도를 찾아다니는 삶,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시원하게 파도에 올라타는 서퍼의 모습. 그 파도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서퍼만이 볼 수 있는 풍경. 나는 거대한 파도를 즐기는 서퍼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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