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심장이 터질 듯 온 세상을 품에 안았던 그 순간을 그리워하며

by 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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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반 계주 선수들 앞으로 나와주세요.”

“아들 파이팅! 열심히 달려!”

“6반 파이팅! 6반 이겨라!”

갈색 흙바닥에 석회 가루로 그어진 흰색 선에 여섯 명이 일렬로 섰다. 그들의 얼굴은 일본 50년 초밥 장인이 식재료를 고를 때처럼 사뭇 진지하다. ‘자 준비.’ 그 순간 주변을 둘러싼 수백 명의 군중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더러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또 더러는 곧 침이 떨어질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섯 명의 여자는 전투에 나갈 장수처럼 자세를 잡았다. 적갈색 말을 타고 기다란 창을 단단히 잡고 오로지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성문이 열렸다.

‘탕’.

빨강, 노랑, 하얀, 파랑, 초록, 보라. 여섯 명은 색깔 봉을 손에 쥐고 열심히 달렸다. 크게 뜬눈에서는 강한 열기마저 느껴졌다. 마지막 경기인만큼 옆 사람에게 지지 않겠다는 투지가 운동장을 뒤덮어 군중들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 빨간색 봉을 쥐고 이등을 달리고 있는 지수가 우리 팀 첫 선수다. 지수는 달리기가 빨랐고 무엇보다 옆과 뒤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끝까지 달리는 게 큰 장점이었다. 네 바퀴 남자 순서에 접어들자 경쟁하던 몇몇은 코너에서 발이 꺾여 넘어지기도 했다. 우리 팀 지석이는 넘어지던 노랑 선수에 휩쓸려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지석이는 아프지도 않은 지 금세 일어나 절뚝거리는 다리로 수정이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빨강 마지막 선수 앞으로.”

슬비는 첫 번째 코너를 돌고 있었다. 아까 지석이가 넘어지는 바람에 앞에 세 명의 선수가 있었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슬비는 우리 학교 여자 중에 가장 빨랐다. 이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슬비는 보라를 지나, 초록을 지나쳤다. 마지막 코너만을 남겨둔 슬비는 어느새 파랑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나도 자세를 잡았다. 적토마를 타고 천하를 누빈 여포를 생각하며 저기 오고 있는 적토마를 맞을 준비를 마쳤다. 커다란 방천화극을 꽉 쥔 팔을 내밀었다. 슬비가 거의 다 오자 앞으로 천천히 달리며 적토마의 발걸이에 발을 올렸다.

‘가자, 적토마야.’

나는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천리를 단숨에 달릴 기세로 빠르게 발을 휘저었다. 하지만 앞을 달리는 파랑 녀석도 만만치 않았다. 흉마인 적로를 타고도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저 유비 녀석은 쉽게 져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코너를 돌아 마지막 스프린트 구간에 돌입하자 나는 갑옷을 벗어 던지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몸을 숙여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빠르게 달려가 칼을 두 개나 들고 있는 유비와 마침내 마주했다. 긴 방천화극으로 틈새를 공략했지만 두 개의 칼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러다 유비의 호흡이 잠시 흐트러진 사이 나는 단숨에 유비를 쓰러뜨리고 선두를 쟁취했다. 마침내 코너를 지나자 귀가 터질 듯한 함성과 앞에 아무도 없는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하늘로 고개를 젖혔고, 맞이하는 흰색 선을 당당하게 끊어버렸다.


어느새 찾아온 가을에 점퍼를 동여맸다. 오후 2시 가장 따뜻한 시간임에도 바람이 매우 찼다. 카페에 가는 길, 집 앞에 있는 중학교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무슨 일 있나 슬쩍 봤더니 운동회를 하고 있었다. 찬 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동여맸던 두 손이 머쓱해서 주머니에 손을 푹 꼽았다. 벌써 스물하고도 다섯. 곧 여섯이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나도 10년 전에는 저기 서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잠시 추억에 잠겼다. 가을의 하늘은 유난히도 높았고 푸르렀다. 구름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 구름이 10년도 전 운동회 날, 내가 달리는 그 순간 위에 떠 있던 구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하늘을 달리기 시작해 드넓은 지구를 한바퀴 돌아 마침내 내 머리 위로 다시 돌아왔으면. 운동회를 조금 더 지켜보다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할 일을 해야지. 입꼬리를 스윽 올리고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카페에 들어가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으로 커피를 시켰다. 곧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얼음이 가득 담긴 시원한 커피를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한 자 한 자 읽어 나갔다. 어느새 운동회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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