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by 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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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년간 소속됐던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해방되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이 감정을, 지금 이 상황을 해방이라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방이라 한다면 어떤 구속과 나를 옭아매던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과연 맞는 표현일까요. 아마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선택했기 때문이죠. 그렇게 25년이 지났습니다. 생각보다 긴 시간 나를 발전시켜야지, 공부해야지 잠도 줄여가며 쌓아온 소중한 신분이 사라졌습니다. 안락하게 보호해 주던 울타리가 헐거워 떨어졌습니다. 한평생 울타리 속에 갇혀 살아온 양이 오히려 문을 열어주고 울타리를 없애도 나가지 못하고 있군요. 텅 빈 공터에 가만히 서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잠시 과거로 돌아가 지난 25년 간의 성장 과정을 살펴봅시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니 제외하더라도 고등학교 대학교는 수동적이나마 제 선택이 들어갔으니 그때부터요. 고등학교 1학년 제 평균 내신은 4.8이었습니다. 노는 게 좋았죠. 고등학교 2학년 남들 다 그러하듯 갑자기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휩싸였고 그때 정한 나름의 원대한 목표는 결국 ‘대학 가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대학에 가는게 어째서 목표였을까요. 무슨 대학의 어떤 과를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대학교에서 가서 무슨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학교’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니. 지금 다시 묻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가서 뭘 하고 싶니. 어째서 대학에 가고 싶은 것이니.

어찌어찌 내신을 끌어올려 3학년이 됐고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대학 쓸래.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성적에 맞춰 조금 높거나 적당하거나 조금 낮은 대학을 쓰면 그만이었죠. 문제는 무슨 과를 쓰느냐였습니다. 당시 문과(지금도 문과지만)였던 저는 경영학과를 적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문제가 아니었죠. 고민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고민할 수조차 없었죠.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무엇을 고민할 수 있었을까요. 같은 이유로 경영이 무엇인지, 경영학과에 가면 무엇을 배우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문과는 경영이지. 경영이 그나마 취업 잘 된대. 충분했습니다. 모든 과를 경영학과로 지망했습니다.

그토록 가고 싶던 대학에 왔습니다. 취업이 잘 된다고 들었던 경영 강의를 들었고 듣고 나올 때면 늘 같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영은 뭐지?’ 고민할 시간도 없이 친구들과 모여 손이 떨리도록 알코올을 들이켰고 정신을 차리니 입대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꿈만 같더군요. 21살 내가 뭘 안다고 벌써 군대에 가느냐. 내가 왜 끌려가야 하느냐…


오히려 다행이었을까요. 군대에서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휴대전화도 없었고(저녁에는 주긴 했지만) 낮에는 정말 할 게 없었습니다. 가까이 했던 것은 시간을 보낼 책과 공책에 아무 말이나 끄적이던 것이었죠. 낙서도 하고 그림에 재주도 없던 내가 그림도 그리고 처음으로 독후감을 써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뭐지? 글이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뭐지? 내가 누군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하고싶다는 걸 찾았고 그대로 전과해 글을 배웠습니다. 책을 더 가까이했고 에세이며 시며 소설을 접하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수많은 낙담을 겪고 있습니다. 재미 없다는 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말, 진부하고 신파적이라는 말. 가장 속상했던 말은 깊이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글에는 내가 묻어나고,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엿볼 수 있고, 그렇기에 진심으로 오랜 시간 들여 쓴 글이 부정당하는 기분. 그것은 곧 내가 부정당하는 기분. 내가 깊이가 없구나. 깊은 물 속으로 물 속으로 점점 잠식당하는 기분.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이렇게 배우는 거지 어영부영 둘러댔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버스 창가에 앉아 그날따라 들려오는 외로운 음악에 가슴 아파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신발을 끌고 돌아와 유난히 일찍 침대에 들어갔습니다. 책상에 앉아 부족한 점을 다시 살펴보고 좋은 텍스트를 집어넣으려 시도해도 머리는 뜨겁고 도저히 책이 손에 잡히질 않더군요. 똑바로 누워 잠을 청하지만 크게 열린 가슴이 자꾸만 하늘의 달을 끌어당겨 몇 번은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듭니다. 그리고 그런 날은 꼭 무서운 꿈과 함께 밝은 보름달에 소원을 비는 꿈을 꾸다 눈을 뜨더군요. 꿈을 꿔서 그런지 잠을 많이 자고 일어나도 몸은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양파 백 개를 연속으로 맞이하는 눈의 심정일까요. 그래도 어쩌겠니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찾고 나를 잊으려 글을 씁니다.


지금까지 똑바로 알았던 것이 없었습니다. 왜 고등학교를 갔는지, 배우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는데 대학교를 갔고, 겨우 찾은 좋아하는 일에서조차 나를 잊고 있었습니다. 물론 무지를 아는 것이 앎의 시작이겠지만 저는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무지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도 어떻게 하면 재밌게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러니를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매력적인 인물을 그려낼 수 있을까만 고민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불가능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아는 척만으로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은 알겠군요. 저를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글을, 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마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나를 몰랐음을 받아들이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심지어 25년을 함께 해온 나 조차 모르는 내가 주제 넘게 안다고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부끄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채워질 것은 부끄럽지 않은 것과 나로 가득할 뿐입니다. 나를 알아가겠습니다. 나를 표현하겠습니다. 나로 가득한 내 글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렇게 한발짝 한 발짝 공터를 가로질러 두려운 울타리 밖으로 작은 발을 뻗어보겠습니다. 조금은 아름답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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