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아요.

-싱어게인 3 을 보며

by 성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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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21일. 어쩌다 보니 불 꺼진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 싱어게인 3을 보고 있었다. 한 가수의 무대가 끝나고 들려오는 심사위원의 평가에 눈물이 솟구쳤다. 혹여 방에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들킬까 바로 뒷방에 있는 동생에게 들킬지 걱정됐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댐이 방류하는 것처럼 묵혀 있다 오랜만에 쏟아진 눈물은 따듯했고 동시에 시원했다. 고개를 위로 쳐들고 나오는 신음만 겨우 막으며 조용히 슬퍼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목이 부었는지 그날따라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만성 비염이 있어 환절기만 되면 겪는 고질병)았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글도 써지지 않아 체념하고 티브이 앞에 앉았다. 건식족욕기에 발을 집어넣고 소파에 앉아 멍하니 티브이를 시청했다. 편도가 부었는지 머리가 띵하니 지끈거렸고 계속해서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잠에 들었다 깨니 머리 뒤에는 쿠션이 여러 겹 쌓여있었다. 침까지 흘리면서 잔 이유가 있었구나. 어머니랑 아버지는 자는 나를 피해 방에 들어가셨고 거실 불을 꺼주셨다. 마침 티브이에서는 최근 즐겨보는 프로그램인 싱어게인 3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 방송은 특히 긴장되고 기대되는 무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싱어게인은 출연자들이 ‘**호 가수’ 즉 익명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이번 무대를 통과하면 TOP10에 선정되어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모두가 이를 갈고 무대를 준비했다.

한 가수가 무대를 끝내자,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

‘새로운 거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원래는 감미로운 발라드를 주로 불러왔던 **호 가수는 댄스곡을 선정해 신나는 무대를 준비해 선보였다. 심사위원들은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무대에 서면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나 봐.’ ‘그러게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심사평.

“이런 말 드리기 죄송하지만, 오늘 무대는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합니다. 아쉽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덤덤하고 아쉬운 얼굴로 심사평을 받아들이는 **호 가수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갑자기 어떤 전조증상도 없이 가슴이 울컥하더니 눈이 뜨거워졌다. 당황할 새도 없이 눈에 눈물이 고여 다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이윽고 얼굴 근육이 구겨진 종이처럼 힘껏 구겨지더니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게 입을 틀어막는 일뿐이었다.


최근 내 소설을 볼 때 답답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복잡한 현실을 잘 반영한 인물 중심의 소설을 쓰려고 다짐했고 분명 그렇게 구성했는데 막상 완성된 글에서 인물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돋보이지 않았다. 인물 심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지식이 부족해서 그럴까. 한동안 타자에서 손을 떼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 고민했다. 글은 결국 나를 보여주고(글에는 그 사람이 묻어나기에) 알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썼기에 빈 알맹이 같은 글이 나왔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라캉의 심리학,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과 글을 접하고 나를 탐구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있는데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번번이 글로 드러나지 않아 자신에게 답답했고 화가 났다. 부족한 나를 가리려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글의 개연성과 짜임새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부족함을 가리려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인물을 위한 글로 시작했지만 언제든 끝엔 인물이 숨겨져 있었다. 나를 방어하고자 발동한 방어기제가 나를 한없이 괴롭혔다. 어떻게 하면 공부한 티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적으로 핍진성을 높이려 전문적인 지식을 공부했고 그걸 글에 녹여내는데 급급했다. 정작 목표로 했던 인물 심리와 나에 대한 고민은 뒤로 한 채. 맞지 않은 옷을 입어 놓고 스스로 괴로워했다.


내가 왜 글을 좋아하느냐에 대한 답은 결국 이것이었다. ‘나는… 글이 좋다.’ 여러 이유를 붙여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내 이야기가 조금 더 와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식적이다. 뚱딴지같은 소리다.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도 안 되는 보여주기식 이유다.

정말로 글을 좋아함이 분명한데 과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여러 이유로 나를 포장하고 숨겼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글에 드러났다. 솔직해지자. 맞지 않은 옷을 벗어 던지자. 나를, 내가 가장 잘 아는,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나를 보여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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