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

-<이방인>을 읽고

by 성성이

그 유명한 첫 줄과 마주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한 줄은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뫼르소’라는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잘 보여준다. 단 한 줄에, 처음 들어가는 이 문장에 압도당했다. 궁금해졌고 빠져들었다. 엄마가 죽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주변 인물들처럼), 옆집 아니 어쩌면 친구 팔촌의 강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법한 반응.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가 낯설었고 그리고 신선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다면(차마 죽었다는 표현을 쓸 수 없었다) 어떨까 하는 상상은 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엄마가 어제 죽었는지, 오늘 죽었는지 헷갈리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알베르 카뮈의 대표적 철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이는 카뮈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살아있다는 명철한 의식과 반항에 대한 열정이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신의 창조도, 부처의 의지도, 결코 우리가 원해서도 아니다. 그저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만난 유전적인 결과물일 뿐.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 우리는 평생을 벌어도 좋은 집 하나 장만하기 힘들고, 먹고 싶은 것을 먹기 위해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선택한 것이 아닌 이 삶 속,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끝인 자살 뿐이다.

선택한 삶이 아닌 이 삶 속에서, 부조리 같은 이 삶에 대항하는 유일한 수단인 자살. 결과론적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은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다. 앞선 말처럼 선택 하지도 않은 이 삶 속에서,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째서 더한 고통을 찾아가며 아득바득 살아가는 것일까.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당신은 무얼 위해 아파하며 살아가는가.


카뮈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왜 자살을 하지 않느냐 묻고 있지만, 카뮈는 결코 자살을 선택하라 자살을 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반대를 피력하고 있다. 선택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이 삶, 그러니까 어떤 이유를 가지고 신이 만든 것이 아닌, 어떤 당위성도 없이 생겨난 우리 삶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고 뫼르소의 태도를 통해 강한 어조로 물어오는 것이다. 어차피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짧은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이유를 부여할 것이냐 물어오는 것이다.

배가 고파 밥을 먹고, 눈이 뜨여져 하루를 살아가며 그저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 자체로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고통받으며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돈을 벌며 자살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물어오는 것이다.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큰 버팀목 내지는 목표지 않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세상을 살아가며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목표며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를 것이기에. 그러나 이면에 담겨있는 본질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우리 삶을 빛내줄 어떤 행복을 찾는 것.’ 어쩌면 이 행복을 찾는 것이 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겠다.

돌고 돌아 행복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떨 때 행복한가. 많은 돈을 벌어 먹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살 때? 사회적 지위를 높여 많은 사람들에게 우러러보게 만들 때? 물론 행복할 수 있다. 큰 노력을 들여 큰돈을 벌고 부단히 발전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였으니.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살아오며 접한 매체와 콘텐츠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내 머리와 마음은 결코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소리치고 있다.

심리학 제3의 거장 아들러 이론을 정리한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행복은 무엇인가. 내 삶의 바탕이 되는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온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유익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 느끼는 ‘공동체 감각’, 타인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나만의 느낌인 ‘공헌감’이 행복이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 본능에 담긴 생존본능.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 결국 남을 돕는 타자 공헌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나만을 생각하는 좁은 시선을 넘어 또는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선을 가지는 것.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대자연과 맞닥뜨렸을 때 다가오는 그 경외감이 행복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카뮈가 죽음에 대해 무섭게도 냉소적인 뫼르소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다시 톺아보면 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뫼르소에게는 감정의 변화라는 것이 크게 보이지 않았다. 죽음에 대해 냉소적인 그는 조금 다르게 보면 삶 자체에 냉소적이었다. 변하지 않는 그저 그런 삶만으로 그는 충분했다. 크게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지만 행복하지도 않았다. 남에게 무섭도록 무관심했던 그였기에. 카뮈는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까.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짧은 인생을 살아가며 결코 찾지 못할 본질적이고 원대한 질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 과정이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이자,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길고도 짧은 여정.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나를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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