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반드시 ‘써야겠다.’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이 순간이 그렇게 느껴졌는데 우선 그 순간을 살짝 말하고 들어가겠(내 이야기가 아니기에)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같은 느낌을 받기를 바라며.
여자 친구와 함께 카페에 들어갔다. 밥을 먹고 집에 가기엔 시간이 일러 들렀던 곳이고 분명 처음 가는 곳이었다. 카페는 오랜만에 놀러 간 친구 집처럼 낯설지만 익숙하게 정이 가는 곳이었다. 커피 두 잔과 작은 디저트 하나를 시킨 뒤 찬찬히 걸으며 내부를 살폈다. 걷다가 발이 닿은 곳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책장 앞이었다. 원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도 칠 예정이었지만 우연히 꺼낸(세상엔 참 우연한 일이 많다) 책이 너무 재밌어 함께 책을 읽게 됐다.
‘오랜만에 제주도를 찾았다. 언제 마지막이었지… 군대 가기 전이니까 스물한 살이 처음이자 마지막 제주였다.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찾은 제주는 두 번째임에도 처음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돌하르방과 현무암을 본 뒤에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오빠! 너무 신나지? 나도 너무 신나!”
분명 여자 친구가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전날 일하고 일찍 일어나 피곤해서 그런가… 사실 그녀 말처럼 그다지 신나지도 않았다. 한여름 밤늦게까지 지지 않는 해처럼 길고 지루했던 대학교 4년 과정을 얼마 전 마쳤고, 귀찮고 끈질기게 괴롭히던 동아리 회장직도 마침내 내려놓았기에 조금 지쳐 있었다. 눈을 비벼 다시 똑바로 눈을 뜨고 행복한 얼굴로 환하게 웃는 여자 친구를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미리 주문한 도시락 케이크(우리의 기념일이었다)를 찾고 마트에 들려 술과 안줏거리를 사고 바다를 구경한 뒤 숙소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다니느라 거의 2시간가량을 운전하다 보니 잠시 잊었던 피곤이 몰려왔다. 그대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찾아둔 맛집이 있어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아무리 제주도라고 해도 겨울밤 날씨는 무시할 수 없는지 찬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배가 고파 빨리 먹고 싶었지만 유명한 식당이라 그런지 한참 동안 기다리다 겨우 들어갔다.
“두 분 저쪽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사장님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쇄골이 넘어가도록 기른 수염에 헤어 두건을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금 움츠려드렸다. 벽지에는 읽을 수 없는 한자들이 가득 적혀 있었고 군데군데 뜯겨 있어 그 흔적과 정겨움이 듬뿍 느껴졌다. 오늘 저녁은 제주도의 신선한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해물 만두전골이었는데 식당 분위기와 참 잘 어울렸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만두전골은 생각했던 맑은 국물이 아니라 빨간 국물이었지만 딱새우, 문어, 각종 어패류와 야채로 그득해 군침이 돌았다. 불을 끝까지 올리자 금세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김이 오르자 차가운 쇠숟가락을 담궈 뜨거운 국물을 퍼 입에 집어넣었다.
“운전 좀 해줄 수 있어? 나 도저히 못 참겠는데.”
“그래! 대신 많이 먹지 마. 이따 같이 먹어야 하니까.”
“알겠어 알겠어. 사장님! 여기 한라산 한 병만 주세요!”
차가운 소주를 작은 잔에 따랐다. 꼴꼴꼴. 정말 꼴꼴꼴 나는 그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던지. 술이 차가운 탓에 잔 겉면은 금세 하얀 김이 서렸다. 뜨거운 국물을 퍼서 준비하고 차가운 소주를 입에 털었다. 쓴 알코올이 넘어가자마자 얼큰하고 따뜻한 국물로 입가심하니 ‘크’.
“오빠 진짜 좋은가 보네. 행복해 보여.”
“그래?”
행복. 잠시 잊고 있던 그 낯선 단어에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가 행복해 보이는 거지. 얼굴을 더듬어보니 입꼬리가 한층 올라가 있었다. 소주가 넘어갈 때 가슴이 간질거렸던 그 기분. 그리고 재빨리 얼큰한 국물로 입을 가득 채웠을 때 느껴지던 따듯한 온기. 행복이었구나.
이상하게 군대를 다녀온 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고 크게 기쁘지도 크게 슬프지도 않았다. 서사의 세계처럼 반드시 한쪽으로만 흘러가는 직선이 된 기분. 시계의 시침, 분침처럼 매일 돌기만 하는 기분. 거기엔 어떤 의미도 없다.
어째서 행복했던 걸까. 채소와 해물이 깊이 우러나 맛있는 국물이긴 했지만, 제주도에서의 첫날 밤이라는 감성이 무의식 속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피곤한 몸에 술이 들어가니 노곤해져 기분이 좋아졌을 수도 있겠지만… 꼴꼴꼴. 소주 한잔을 입에 더 털어 넣고 뜨끈한 국물과 아삭한 채소를 씹었다. 다시 올라가는 입꼬리. 그렇게 우물거리며 청경채의 아삭함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래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행복하면 행복한 거지. 맛있으면 맛있는 거고 여행 와서 즐거우면 즐거운 거지. 많은 생각을 하며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군대를 다녀왔으니 철이 들어야 해. 이제 슬 취업 준비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해. 성적 잘 받아야 하니까 미리미리 계획 세워서 공부해야 해. 생각이 많았고 자꾸만 앞을 내다봤지만 정적 몸은 행동은 그대로였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레고를 조립했지만, 레고가 놓인 선반에 팔이 닿지 않아 고통스러워 울고 있는 아이와는 달랐다. 정신의 성장과 신체의 성장 차이가 다른 것에서 다가오는 원초적 고통이 아니라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혼자 다 큰 척 겉멋 들어있었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을.
“아 오빠. 천천히 좀 먹어. 이따 숙소 가서 나랑도 먹어야지.”
“알았어 알았어~ 근데 너무 좋다.”
그렇게 소주 한 병을 깨끗이 비우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 앉아 의자에 몸을 뉘여 창밖을 보았다. 혼자 즐겁겠다고 소주 먹은 나 대신 운전해 주는 예쁜 여자 친구도 보았다. 온통 어둠에 뒤덮여 있지만 바람과 현무암과 드넓은 바다와 행복으로 가득한 제주를 눈에 담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아까 바다에서 주운 현무암이 만져졌다. 구멍이 송송 뚫려 신기한 촉감. 나는 계속해서 돌을 만지작거렸다. 투박한 그 느낌이 참 좋았다.’
한참을 재밌게 읽고 책을 덮었다. 꼴꼴꼴 소주가 따라지며 빈 잔이 채워지는 모습, 찬 소주가 목을 넘어갈 때 고스란히 느껴지는 씁쓸함, 뜨거운 국물을 입안에 습 털어놓고 캬 외치는 소리. 생생했다.
“오빠 근데 이거 꼭 우리 얘기 같다. 우리도 얼마 전에 제주도 갔잖아. 첫날에 만두전골 먹었고 오빠도 혼자 소주 먹었잖아. 이번에 졸업하기도 했고. 신기하네.”
“그러게. 나랑 완전 똑같네.”
책을 집어넣고 여자 친구와 이야기했다. 제주도에서 만두전골에 소주를 마신 이야기. 배가 너무 불러 예약했던 도시락 케이크를 다 먹지 못한 이야기. 여자 친구가 대신 운전해서 숙소로 갔던 이야기. 다시 제주도에 온 것처럼 생생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도 잠시 잊은듯 했다. 크게 뭘 하지도 않으면서 앞을 걱정하고 있었고 매번 피곤하다고 하기 싫다고 다짐한 일을 미루고 있었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을, 매일 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그냥 하면 되는 것을. 내가 나를 가두고 있던 요상한 아이러니. 나는 내 행복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었나 보다. 괜히 행복한 감정에 취해 게을러질까 봐. 나태해지고 오만해져 나아가지 못할까봐. 피곤한 한 남자가 추운 제주도 밤에 만두전골에 소주 한잔한 이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나에게 많은 말을 건네온 것 같다. 꼭 나를 보는 기분.
시간이 늦어 커피를 다 마신 후 점퍼를 챙겨 입었다. 어느새 마른 입술에 립밤을 바르고 나갈 채비를 했다. 여자 친구 손을 잡고 카페를 나가며 나머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만져지는 투박한 촉감. 뭐지. 구멍이 송송 뚫리고 투박한 것이 꼭 현무암 같았다. 나는 계속해서 그 돌을 만지작거렸다. 그 느낌이 참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