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는 단전호흡의 단계 중에 '귀일법'이라고 있다.
귀일법 초기에, 내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단계가 무르익을 때까지, 몇 개월에 걸쳐 참 많이도 울었었다.
기억은 시간 차를 두고, 바로 선명하게 떠오른 것과 서서히 떠오른 것들이 있었다. 바로 떠오른 것은, 어린 날의 미숙함과 어렸어도 하지 말아야 할 잘못된 행동이었다. 깊이 반성하게 되는 부끄러움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그 부분이 지금도 여전히 안타깝다.
어릴 적,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똑똑하다'는 말을 제법 들었다. 아버지는 은근히 나를 내세워 보란 듯 뭘 시키곤 했었다.
어린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법이 '똑똑한 척'하는 거란 것을 알고'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말과 행동을 했다. 혼자 천자문을 배워' 아버지가 요구하는 책의 글과 뜻을 읽어냈다. 아버지가 내미는 주관적인 철학적 질문에 찰떡같이 마음에 들만한 대답을 하기도 했었다.
귀일법 단계에서 서서히 떠올랐던 것은, 저 기억 뒤에 감춰져 있던 어두운 민낯이었다.
나는 그렇게 '똑똑한 아이'로 촉망받은 줄로만 알았었다.
혼자 있을 때마다 들었던 어른들의 혀 차는 소리, 걱정인 듯 걱정이 아니었던 말들,
그 말들이 조금씩 떠오르더니, 얼굴도 기억나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났었다.
상처가 되었 던 어른들의 말들.
감당이 안되어 서둘러 봉인시킨 기억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이 묻어 두었던 것들.
그중 하나가 아버지 환갑 때 일이었다.
내 나이 10살 남짓이었다.
단칸방과 좁은 마당 가득 모인 어른들은 종일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왁작지껄 놀았다.
어린 내 눈에, 그 속에 섞인 엄마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고, 오후쯤 되자 나는 무척 피곤해져서 어서 눕고만 싶어졌다. 끝나기를 기다리다 지쳐, 나는 엄마를 불렀다. 이미 술에 취한 엄마는 처음 취한 술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헤죽헤죽 실없이 자꾸 웃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싫고, 겁이나서 울었다.
서서 소리도 못 내고 울기만 했다.
그때 가까운 친척 올케가 다가와 내 옆구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구석으로 몰았다.
그러면서 입을 앙다물고 작은 소리로 연신 ㅡ왜 울어! 왜 울어! 이 좋은 날!ㅡ하며 손에 힘을 실어 옆구리를 자꾸 밀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 무서워 얼었다.
몰리고 몰려서 재래식 화장실 입구까지 간 나는, 한 걸음 더 물러서다 우리 집에서 가져다 둔 요강에 걸려 주저앉듯 넘어졌다.
그 바람에 요강을 건드려, 가득 차 있던 오줌을 뒤집어썼다.
친척 올케는 내 이마와 머리, 그리고 옆구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ㅡ죽어! 죽어! 나지 말지. 왜 태어나서 사람 여럿 고생 시켜!ㅡ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친척 올케뿐 아니라 모든 어른들에게 예의 바르고 눈치 빠른 아이로 자랐다. 마음 깊이 숨긴 뜨거운 분노와 얼어붙은 감정을 가지고, 착한 척, 괜찮은 척, 똑똑한 척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복수하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컸던 까닭에, 기억을 봉인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는 전혀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귀일법 마지막까지 나를 오열하게 했던 감정은, 엄마로 인한 거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두 해쯤 지나서였다.
나는 엄마에게 마음에 없는 말일지라도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다.
나는 순하고 좋은 딸이 아니었고, 동생처럼 효도하지 못했지만 엄마도 나에게 모진 엄마였다. 순한 얼굴이었지만, 차갑고 무심했다. 중립에만 서줘도 좋았을 텐데, 엄마는 항상 내 반대편에 서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대놓고 무심했고, 동생은 나에게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무례해졌다. 센 말발로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 뿐 아니라 바닥에다 몇 번을 내다 꽂고도 성이 안 풀려, 씹어먹고 싶어 한다고 느낄 만큼 감정 표출이 대단했었다.
내가 하는 모든 게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들었는 데다, 그저 나는 나대로 했을 뿐이었지만, 동생을 자꾸 자극하는 결과가 되었다.
가끔씩 나도 자신 있게 내 지른 말들이 일방적이어서, 그럴 때는 동생을 더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생 또한 독재적 성향이 강해, 통제받는 것에 분노하고 남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런 성향을 건드린 날에는, 분노가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결국은 내가, 밀대로 밀린 것처럼 납작해져서야 엄청나게 쏟아지던 무자비한 폭언이 끝났다.
입장차이 또는 의견차이로, 어떤 것은 가벼운 언쟁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증폭제를 탑재 한 감정은 작고 가벼운 일 없이, 항상 극으로만 치달았었다.
엄마는 그런 일이 엄마 앞에서 벌어져도 한 번도 나서서 중재하거나, 동생을 자제시키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상처 입어 허덕이는 나에게 ㅡ동생한테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그렇게 질벙질벙 울지 마라ㅡ고 충고했다.
그리고 내 항의는 들리지 않는 척, 바쁘게 움직이는 것으로 외면했다.
엄마가 그때 불편했었던가?
싸움이 끝난 뒤, 나에게 보인 엄마 표정에 근심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편안했다.
싸움 자체만 불편했었구나!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그 세월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떤 일은 섭섭함과 원망으로는 부족한 일도 있다.
26시간 진통을 하고 아기를 낳았을 때,
엄마는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왔다는 내색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낯선 사람처럼 있다가, 아기 얼굴 한번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가셨다.
나는 이십일 넘게, 젖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빈 젖을 물렸었다. 출산이 처음이었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유축기를 사서 짜봤다. 티스푼만큼 나왔다. 우유를 사서 먹였지만 넘기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삼키면 왈칵 토해내고, 또 왈칵 토했다. 안 돼서 미음도 끓여 먹였다.
병원에선 이상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애를 셋 낳아 키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ㅡ엄마, 내가 젖이 안 나와서 우유를 먹였는데, 자꾸 토해, 어떻게 해야 돼?ㅡ
그때도 그랬다.
엄마는 대번에 말했다.
ㅡ그걸 나한테 물으면 내가 어떻게 아나 ㅡ
그게 다였다.
엄마가 다 알 거라고 생각하고 전화했던 건 아니었다. 먹지 못 하는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고, 겁이 났다.
터전이던 서울을 떠나,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유배지 같은 곳에서, 의논할 사람조차 없었다.
걱정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아기니까
ㅡ애기가 배가 고프다고, 엄마! 주변에 엄마 아는 사람들 있잖아요! 애들 많이 낳아 본 사람들한테 좀 물어봐 달라고!ㅡ
나는 그때 속에 똬리를 튼 것처럼, 아픔이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을 느꼈었다.
엄마만 털고, 새털처럼 가볍게 갔느냐고 돌아가신 엄마를 원망했었다.
엄마에게 듣고 싶은 한마디는, 영원히 듣지 못한다.
ㅡ미안하다. 우리 딸 ㅡ
내 손잡고 한마디만 해줬으면...
귀일법 단계가 끝날 무렵, 정화가 되면서
깊고 짙었던 원망은 점점 얕은 원망으로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이제는, 나보다 총량이 적었던 엄마를 감싸 안는다.
경험하는 것들을 탐구하고 분석해서, 내적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없었던 엄마는 어리고 유약한 영혼이었다.
나이 어른이 모두, 진짜 어른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니까 이해하고, 허물을 덮는다.
어쩌면 엄마는
먹기는 해야겠는데 쪼개서 꼭꼭 씹을 만한 도구는 없고 덩어리째 삼켜야 하는 무언가처럼, 그저 사는 동안 경험한 덩어리를 어떻게든 삼키는 일에만 급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소화되지 못 한채 속에 걸려 있는 덩어리 때문에, 사는 내내 얼마나 힘들고 벅찼을까?
그중에 가장 큰 덩어리가 나였을 것이다.
엄마 이젠 괜찮지?
살아내느라 참 고생 많았어.
다음 생은 좀 났겠지.
나는 엄마의 표정을 닮았다.
걸음걸이도 닮았다.
엄마가 그랬듯, 나도 아버지와 똑같은, 돌풍 같은 배우자를 만나 아무것도 함께하지 못한다.
나와 엄마의 거리감처럼, 나도 내 아이와 썩 가깝지 않다.
마음도 엄마처럼 경직되어, 딱딱하고 유연함이 떨어진다.
그래서, 나도 내 아이를 가끔씩 아프게 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좀 다르게 살고 싶다.
끝내는 덩어리를 녹여, 모두를 품고 다독이며, 함께 잘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
아직은 바람일 뿐이지만, 나의 성장이 그 방향으로 열려 있다면, 마지막 날까지 노력해 볼 작정이다.
엄마, 나도 이제 괜찮아.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