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800km, 20일 차
2019.10.20
온따나스 Hontanas → 이떼로 데 라 베까 Itero De La Vega
온따나스 안녕-
오늘도 마을을 떠나보낸다.
어제 저녁을 먹을 때,
순례길을 5번째 걷고 있다는 스페인 아저씨가
다음 마을까지 가는 길이 예쁘다고 해서
오늘의 풍경이 궁금했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 터라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아서 그렇지,
길이 예쁘긴 예쁘다 싶었다.
삐뚤게 나 있던 나무.
아니지, 삐뚤게 자라는 게 아니지.
그건 내 시야에서나 그런거고,
햇빛도 받고, 비도 맞고, 뿌리로 양분도 흡수하며
나무는 잘 성장해가고 있는거겠다.
자기의 모습대로 잘 크고 있는 나무.
'마을인가?' 했는데,
마을이 아니고 성곽이었다.
오, 크다.
그렇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어디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확대해본다.
흐흐.
인터넷이 터졌다면
톡을 바로 보냈을텐데
아쉽게도 핸드폰에 '제한금지구역' 표시가 떴다.
어제 우연히 같은 마을에 머무르게 됐지만
다른 알베르게에서 잠을 잤고,
이미 혜수는 출발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길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길을 걷는 동안에 보이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기분이 들었는데
중간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한다.
자전거 길과 도보길.
나는 도보길을 보지 못하고서
그냥 자전거길을 따라 아스팔트 길을 걸어왔고,
혜수는 도보길을 따라 흙길을 밟으며 왔다고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같이 걷게 되었다.
오늘의 첫 번째 마을.
바르에서 점심도 먹을 겸 쉬기로 했다.
주인 할아버지께서 엄청 친절하셨다.
나는 생과일 오렌지 주스와 빠에야를 주문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선 다시 출발했다.
그렇게 얼마 안가 보게 된 표지판...
와, 비빔밥에 된장국이라니.
신라면과 김치라니.
혜수랑 엄청 아쉬워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걷다 보니
산 위에 요새같은 게 있다.
마음으로만 이미 위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내려온 걸로.
그렇게 이번 마을과도 작별을 고한다.
... 설마 저기 보이는 산을 올라가는 건 아니겠지?
왼쪽으로 가는 길이기를 바랐는데,
오른쪽 표시다.
산으로 올라가는 게 거의 확실시 되어간다...
비가 내리면 추위도 추위지만,
땅에 웅덩이들이 많아지고
흙길은 진흙밭이 된다.
그러다 보니, 걷는 속도가 훨씬 더뎌진다.
예쁜 다리 위에서 보니,
길이 정말 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이제는 확정이다.
저기를 올라가야 한다.
'그래 뭐, 피레네 산맥도 넘었는데.'
경사 12도, 1050m.
알겠습니다.
갑니다, 가요!
오르막을 오르면서 중간 중간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지나쳐 왔던 마을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흐릿한 배경이지만,
마을이 너무 예뻐서 자꾸 발걸음이 멈춰진다.
다음에 여길 또 걷게 된다면
그 때는 무조건 저 마을에서 자 봐야지,
아까 언덕 위 요새같은 곳도 올라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마을에서
이만큼이나 걸어왔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한국이었다면 이 정도의 거리는
애초에 걸어볼 생각조차 안했을 텐데,
배낭을 메고서 걸어왔다니.
그리고선 뒤를 돌아보며
마을이 예쁘다고 하는 내 모습이라니.
그런 내가 새롭고 낯설지만 좋다.
마을이 정말 예뻐보여서 확대샷까지 남겼다.
그러면서 문득 든 생각은,
'지금 이런 경험없이 이 사진을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저 마을을 예쁘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며 걸었을 때와
마을 안을 구경하며 걸었을 때,
그리고 마을을 지나쳐 한참 뒤에 다시 그 곳을 바라보았을 때의 감정이,
점점 더 좋아져감을 느꼈다.
사람도 직접 겪어봐야지 안다.
외면적으로 자기를 가꿀 줄 아는 것도 중요하고,
(본인의 개성과 취향, 고유성과 특성을 표현하는 것들 등등)
또 그러기 위한 그 사람의 진짜 매력은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내가 마을 안을 직접 걷고 나서야
이 마을이 얼마나 예쁜 지 알게 된 것처럼.
첫 인상부터 알아가고 만나는 과정,
그리고 인연이 다 하고 난 뒤까지도
그 매력이 점점 더 진해지는,
그런 여운이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지나갔던 수많은 인연들 중에서
언젠가 많은 시간이 흘러,
누군가에게 한 번쯤 뒤돌아보며
나를 떠올리게 할 만한 만남들이 많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올라왔다.
그래, 있을거다.
혹은 많을지도 모르지.
내가 상대에게 햇빛이었는지,
비바람이었는지 간에
어떤 식으로든 밑거름으로 작용했을테고
누군가의 삶에 나는 좋은 성장제였을거다.
그들이 나와의 관계를 통해 뭐라도 깨달았다면.
그건 반대로 나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정의내리는 게 아니라
상대를 통해 내가 무엇을 깨달았고 얻었는지,
만남 이후에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가고 싶은지 새겨가는 것.
그것이 모든 인연의 이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인연들을 통해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고,
또 많은 부분을 깨닫고 있고,
그렇게 인연들을 비워내간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성장해가는 중이다.
그래서 앞으로 만나게 될
또 수많은 인연들이 기대되고 궁금해진다.
나는,
그리고 상대는,
그렇게 우리는 어떤 변화의 흐름을 맞이하게 될까.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고,
오르막의 끝무렵에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게 뭐람.
계속 오르막 구간이었는데, 그저 평지처럼 보인다.
왠지 모르게 허무하고 허탈해지려던 순간,
'아, 그래. 오르막이 끝났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도 그럴 때가 있다.
분명 힘든 오르막을 걸었는데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 다시 되돌아보면
그리 느껴지지 않을 때가,
무언가 별거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것에 힘들어한 나를 허무해하며 자책할 게 아니라
그 순간에 그저 깨달으면 되겠구나.
'아, 오르막이 끝났구나.
나 지금 점프했구나.
그만큼 성장했구나.' 라고 말이다.
이것봐.
12%, 1050m를 잘 올라왔다며 따봉해주잖아.
옆에 쉼터가 보여 혜수와 잠시 앉았다.
그렇지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와
쉬면 몸이 더 추워지는 관계로
금방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이야...
근데 이러기 있냐.
내리막길은 18도라니.
그래도 뭐 어쩌겠어.
가야지.
그렇게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비와 안개 덕분에 금새 아무것도 안 보인다.
마치 여기가 세상의 끝인 것만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재밌다.
오늘도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걷다 보면 보게 되는 어느 순례자의 무덤.
You can't eat money.
오늘도 수고하며 애쓰고 있는
나의 발.
그리고 진흙밭을 구르며
오늘도 점점 더
등산화스러워져가는
나의 신발.
Best of best.
이 작은 돌맹이들이 고마울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진흙밭 속에서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고맙다!
질퍽질퍽.
발의 미세한 감각에도
스스로 얼마나 예민하고 세세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되어 새삼 신기했다.
신발에 진흙이 얼만큼 붙는지
그게 발바닥으로 다 느껴진다.
마치 모래 한 알 차이조차도
발로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게
고독스러우면서도
강인해보여 사진에 담아본다.
다리를 건너고 나니
'쁘로빈씨아 데 빨렌씨아' 표지판이 나왔다.
구역이 바뀌었다는 안내라고 한다.
거대한 표지판 옆에서
기념으로 사진도 남겼다!
:)
와,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에도 도착했다.
'이떼로 데 라 베까'
아니, 이거 너무 신기한 나무일세.
나무들인데,
윗부분이 다 이어져 있었다.
뭐지?
혜수랑 궁금해서
계속 살펴보며 궁금해 했다.
오늘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는 여기.
샤워 후, 저녁을 먹고서
혜수랑 와이파이를 찾아
근처 bar에 왔다.
유튜브 편집을 하고,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인스타에 피드를 올리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사실 걸으면서도 계속 핸드폰을 쥐고 있다.
비가 와도, 손이 시려워도.
걸으면서도 중간 중간 포스팅을 하며
사진을 정리하고 일기를 쓰고,
그러다가 지겨우면 유튜브 편집을 한다.
문득 기록하고 싶은 생각들이 올라오면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유튜브에 올릴 영상들도 담는다.
습관이 되었다.
매일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몇 백장의 사진과 몇 십분의 영상이 쌓여있다.
틈틈히 올리며 정리하고
용량을 위해 불필요한 것들은 삭제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다.
또 데이터와 와이파이가 계속 터지는 게 아니고,
연결이 되더라도 많이 느리다 보니
업로드하는 과정 자체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해야 하나?, 나는 이걸 왜 하고 있지?' 할 때도 있지만,
또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가 즐거우니까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걸으며 기록하고 담은 것들을
도착 후, 정리하고 지울 건 지우고
또 그것들을 공유하고 나서야
오늘의 순례길이 마무리가 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기쁘고 뿌듯하다.
그리고 이 기록들이
나의 소중한 경험치가 되어줄 거라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겠구나 싶어진다.
그러고 싶다.
그렇게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창문에 저물어가는 해가 보인다.
스페인은 노을지는 시각이
8시 쯤은 되어야 어둑하다.
해가 뜨기 시작할 때 만큼이나,
해가 지기 시작하면 정말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아름답네.
그리고 오늘도 부엔 까미노-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