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800km, Day 21
2019. 10. 21
이떼로 데 라 베까 Itero De La Vega → 비야르멘떼로 데 깜뽀스 Villarmentero De Campos
오늘 아침은,
'이떼로 데 라 베가' 마을에 안녕을 고하며 출발한다.
이곳에 벽화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마을을 떠나면서 알게 되네.
오늘의 STOP 표지판 낙서는,
"Never stop listening to your ♡"
우리는 이 삶의 여정동안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나의 음료인
멜로꼬똔, 복숭아 주스.
어쩌다 보니,
하루 종일 손에 들고 다니게 된다는 사실!
오늘도 끝없어 보이는 길을 마주한다.
힘들겠지만 또 어떤 나를 마주하게 될지,
어떤 감정과 생각들이 올라오게 될지 좀 궁금하다.
문득 바닥에 귀여운 게 보인다.
달팽이다!
달팽이를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비 온 다음 날이면,
여기저기서 달팽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오~ 너, 멋진 집을 가지고 있구나?"
혹여나 달팽이를 밟을까 싶어 이후로
바닥을 좀 살피며 걷게 되었다.
며칠째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보며 걷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구간을 건너뛰기도 하고,
이제는 이곳이 출근길 같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이도,
그저 빨리 걷는다는 이도,
이 길이 다른 구간보다 좋다는 이도 있다.
모두가 옳다.
자신이 느낀 감정에 옳고 그름은 없으니까.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면 될 뿐.
차가 퍼져서 견인되는 풍경을 목격했다.
지친 몸을 다시 곧게 펴본다.
나는 저리 퍼지지 말아야지!
몸과 마음을 자주 살펴주어야지.
그래야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를
잘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
아까 문장 뭐였더라?
"Never stop listening to your ♡"
걷다가 귀여운 것들을 포착하면
역시 지나치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사실, 사진으로 남기려면 적어도
몇 걸음은 더 걸어와야 한다.
그런 발걸음들 덕분에
매일 지도상에 표시된 -km보다
평균 1-2km는 더 걷게 된다.
좋으니까 힘들어도
더 걸을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
솔직히 애초에 더 걷는다는 인식 자체가 사라진다.
무엇보다 더 걷는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고 찾으며,
그러한 것들로 삶을 채워나가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게 하루, 이틀, 수년, 수 십 년이 쌓이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크게 변해있을지
상상하기 벅차다.
오늘도 성당 위에 새 둥지가 보인다.
이제는 빈 성당을 보면 솔직히 폐허 건물로 보인다.
순례길이라 그런지,
마을마다 꼭 성당을 보고 지나가게끔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
모든 마을의 성당들을 보면서 왔고,
길 중간에도 간혹 보게 되지만
대부분은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빈 성당이다.
어쩌면 결국, 종교라는 형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교회, 성당, 절, 사원, 기타 종교적인 건축물과 장식물에 그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은 그저 신으로 존재하며
자연도 그저 자연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형식적인 구조물 자체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한정 지을 수도 없지 않을까.
순례길 대부분의 성당에 새들의 둥지가 있는 것은,
자연의 눈에 이 성당들은 그저 인간이 지은
또 하나의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예쁜 풍경이 나타났다.
아니, 내가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늘이 우중충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런 날씨에는 사진을 찍으면
웬만해서는 잘 담기지 않는데도
사진상으로도 정말 예쁘다.
종종 기분이 좋을 때에,
고개를 아예 뒤로 젖혀
배낭에 머리를 기대고서 걷기도 한다.
그러면 하늘이 더 잘 보인다.
점점 파란빛을 띠며 화창해지려는 낌새가 보이길래,
이 순간이 기쁘고 설레어
이렇게 잠시 길이 아닌 하늘을 보며 걸었다.
사진 찍는 혜수를 찍는 나.
걷다가 이 나무가 마음에 들어,
다시 한번 뒤돌아 또 찍어본다.
같은 나무다.
그렇게 잠깐 몇 걸음 정도 멈춘 것 같았는데,
혜수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다.
고작 나의 몇 걸음이 아니구나.
나의 몇 걸음과 상대의 몇 걸음을 합쳐야 하는 거구나.
그래서 나의 에너지와 돈, 시간들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내가 불필요하게 소비한 것들만
낭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플러스+로 작용되었을 수 있는
몫의 가치까지 함께 낭비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가을 풍경길.
물에 비친 나무들이 아름답다.
그렇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도
역시 잊지 않는다.
진심 예쁘다.
문득 어딘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혜수.
무슨 생각 중인 걸까?
무엇이 걸음을 멈추게 했을까?
:)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각자의 길을 걷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우리 모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무들이 함께 숲을 이루면서도,
강인하게 자신만의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듯이.
우리들 모두 그러하다.
한국에서는 거의 보지 못하는 건물색이라 그런지,
노랑과 초록의 색감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이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424km!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이라,
너무 멋졌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프로미스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인증숏을 남겨본다.
쉴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파스타와 추천받은 샐러드!
정말 맛있었다.
배를 채운 후,
사진을 찍으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고양이.
애교가 엄청 많다.
"여기로 와볼래?"
와 너무 귀엽다.
그렇지만 줄 게 없어, 미안 고양아.
고양이 덕분에 함박웃음도 터지며
헤어지기 힘들었다.
ㅠ_ㅠ
그렇게 마을을 또 하나 보낸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파랗게 화창해졌다!
몇 시간 전의 그레이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례자 조형물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인증숏 남기기.
순례길에서 혜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혀 남지 않았을 내 사진들이다.
그녀 덕분이다.
길이 이렇게 예쁘고,
화창할 수가 있다니!
해를 가득 담은 동그란 구름이
너무 특이하고 신기했다.
물에 비친 구름도 예뻐서 찰칵.
이번에는 '뽀브라씨온 데 깜뽀스'라는 마을을 만났다.
그렇게 걷다가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니, 이게 누구야!!!?
미키 마우스가 '하이 파이브' 해 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주는 게 인지상정!
그래서 내가 하이파이브 엄청 많이 해줬다.
미키의 손도장들 :)
그리고 다시 시작된 긴 여정.
끝없는 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기분이다.
그나마 비가 내리지 않는 것과
이렇게 예쁜 풍경이라 다행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나무들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는 구간이 나왔다.
여기 그늘에서 잠시 앉아서 쉬기로 했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앉으려는데,
갑자기 혜수가 "소주병!!!"이라고 외친다.
'뭔 소리래?' 하다가,
진짜 앞에 소주병이 떡하니 보인다.
그것도 빛나는 모습으로.
둘이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걷고 걷고, 또 걷고.
드디어 귀여운 키 작은 순례자가 반겨주는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이 구간만 벗어나면
오늘의 목직지에 다다를 것만 같은 느낌이 왔다!
게다가 다행히 진흙밭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힘겨운 오늘의 여정이
이제 곧 끝날 거라는 느낌에,
신이 나기 시작했고
기쁨의 브이 v를 그리며 인증숏을 남겼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입구부터가 오늘의 힘듦을 스르르 녹여준다.
뭐지!
그렇게 들어서자 펼쳐진 동물농장
:) ♡
알베르게 '아마네쎄르'
숙박 7유로
디너 10유로
아침 기부제
이런 2인실 공간도 있었는데
궁금해서 열어보니, 진짜 따뜻했다!
다음에 이곳을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여기서 묵어봐야겠다.
진짜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렇게 주인아저씨가 직접 만들어주신 저녁 요리!
사진으로 담지 못했지만,
정말로 푸짐하고 진짜 너무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무엇보다 정성이 가득히 느껴졌다.
렌틸콩 수프랑 버섯 요리,
스파게티와 샐러드 특히 최고였다.
여러 순례자들과 다 같이 노나 먹고 이야기 나누고
포옹도 나누고 즐겁고 좋았던 하루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