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보길 원한다면, 내리는 비를 이겨내라.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Day 22

by 리테


[2019.10.22]


비야르멘떼로 데 깜뽀스 Villarmentero De Campos

→ 깔싸디야 데 라 꾸에싸 Calzadilla de la cueza




오늘도 눈이 자연스럽게 떠질 때에 일어났다.


그런 뒤에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던

빵과 과자, 티로 아침을 먹은 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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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침 하늘은 정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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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마을에서 추위도 녹일 겸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사진으로 찍어놓지 않으면

이제는 어디에서 무얼 먹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조금 더 세심하게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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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로 가는 지도 밑에

발그림이 계속 새겨져 있다.


괜스레 심오한 느낌이 들었다.


삶의 지도를 걷게 될 우리의 모든 여정이

이렇게 스스로의 발걸음으로만 이어진다는 의미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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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만나게 된 순례자와 인증 사진 남겨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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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 안녕을 고하려던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된 조형물.


포즈 잡기는 늘 어색하고 어렵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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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온'까지 6km,

어느덧 '산티아고'까지는 46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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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매번 다른, 끝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날씨가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

겨울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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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마을에 도착했는데,

반겨주는 벽화가 섬뜩해서 뭔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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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귀여운 벽화를 발견했다.

중간에 높이 점프하는 순례자 그림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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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온' 마을 순례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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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기념품 가게를 방문했다.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발바닥 마그넷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서 보게 된 조가비 핀 배지!


태극기와 조가비무늬라니,

도무지 안 살 수가 없다.


3개 남아있던 것을 혜수랑 하나씩 구매했다.

순례길 첫 기념품이 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누가 사셨을까?'


그리고 오는 길에 날씨가 너무 추웠다.

다행히 중간에 혜수가 빌려준 목도리 덕분에

떨지 않고 따스히 걸을 수 있었던 터라,

아무 무늬 없는 회색 버프도 하나 구입했다.


그렇게 다음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새 파란색에

노란색 화살표와 산티아고가 그려진 버프를 발견하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지게 됐지만.


뭐,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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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다들 오늘은 음료만 주문을 받는다고 한다.


당황스러워 이곳저곳을 들려보다가,

다행히도 한 군데에서 간단한 요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믹스샐러드와 차를 주문했다.


안도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는

한 번에 17km를 가야 한다.


이제 오랫동안 길에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의미.

배를 채우며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는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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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산티아고까지 401km래.

거짓말 (ㅋㅋㅋㅋㅋ)


좀 아까 463km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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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건너는 다리와

예쁜 풍경에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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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온' 조가비랑

다리 밑으로 보이는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마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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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중간중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순례자를 위한 조형물들이 있어서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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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의 목적지이자

다음 마을인 '깔사디야'까지 14km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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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우중충하니,

오늘 참 힘든 여정이로구나.


비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문득 뒤를 돌아보았는데

하늘이 살짝 파스텔톤이다.

저게 점점 넓어져

비가 끝까지 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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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으로 쭉-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코스라,

평소보다 길에 화살표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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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힘들어.

지친다.


땅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아서 쉬어본다.

여기는 왜 벤치도 없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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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래도 하늘에 조금씩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좋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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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만에 발견한 쉼터.

그저 앉을 수 있음에 또 행복감이 올라온다.


쉬면 춥겠지만,

일단은 좀 앉아서 바나나와 빵으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이렇게 긴 여정길에서는 간식거리를 잘 챙겨 와야 함을 새삼 느낀다.

안 그래도 힘든데 허기지기까지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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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우고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뭔가 하늘이 점점 회색빛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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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뒤, 나타난 언덕길 하나.


저길 올라섰을 때 멀리서 마을이 보이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사진을 확대해서 찍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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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저기까지 걸어가야 한다.

오랜만에 울고 싶다.

오늘따라 진짜 힘들고 괴롭다.

죽을 맛이군.


한 번에 17km는 너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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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왜 언덕길에 가까워지지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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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언덕 구간에 들어섰으나,

마을은커녕 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구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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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다 보니 또 나타난 두 번째 언덕길.

과연, 이번에는 저 멀리 마을이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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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무슨,

마을은 여전히 안 보이고

이제는 비까지 마구 내린다.


먹구름 떼에 한동안 갇힌 듯이 걷다가,

어느새 비가 조금씩 그쳐간다.

대각선 쪽으로 비구름이 지나가는 게 선명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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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저 비구름 떼가 우리를 지나갔다.

비도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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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점점 해가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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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반대편 대각선 뒤를 바라보니,

무지개가 떠있다.


"와... 무지개다..."


그렇게 한참을 멈춰 서서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오늘 유독 춥고,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불고, 허기지고 힘들었다.


그런데 하루의 노곤함과 힘듦이

이렇게 무지개 하나로 마치 눈이 녹듯이 녹아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무지개를 보길 원한다면

내리는 비를 이겨내라."



삶에서 힘든 먹구름 떼가 몰려올 때는

묵묵히 버티고 그저 걸어야 한다.


잠시 멈춰서 쉴 수도 있겠지만

비바람에 쉬는 건

오히려 강추위 속에서 홀로 벌벌 떨게 될 수도 있다.


바람과 비를 맞으며 그냥 천천히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에 비는 그치고

비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찬란한 무지개가 떠 있음을 보게 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비구름이 아니라 '무지개'를 본 아름다운 구간으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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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생은 끝없는 돌림 구간인 것을 잊지 말자!

하하.



무지개가 사라지고 나자,

또다시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뭐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거기다 왜 걷는 내내

다른 순례자들을 한 명도 못 봤는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온타나스'처럼

분지 지형의 마을일지도 모른다며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지도 모른다며 위안을 삼아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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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친 마음을 달래다가,

그마저도 지칠 무렵에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마을이 보여."


기쁨도 잠시,

저기까지는 또 얼마나 걸릴까 싶어 괴롭다.


제발,

30분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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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을 꾸역꾸역 참으며 걸어왔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대략 31km를 걸었다.


진심으로 힘든 하루였다며

너무너무 수고했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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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으로 알베르게가 쪼르르 연달아 3개가 보였다.

왼쪽, 가운데, 오른쪽.


"어디로 갈래?"


늘 그렇듯 느낌으로 찍는다.

"왼쪽!"


좋은 선택이었다.

5유로에,

난로가 빠방하게 나오는 근처로 침대를 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밤에 더울 정도로 뜨시게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혜수와 반반으로

세탁기와 건조기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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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에서 50m 떨어진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오우,

이마저도 걸어가는 게 힘들고 춥게 느껴졌다.


메뉴는 순례자 코스였는데

메인으로 닭고기, 소고기, 토끼고기, 생선을 선택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와인이 항아리병째로 담겨서 서비스로 나왔다.


'페레그리나 (여자 순례자)' 맥주가 있길래

재밌어서 사진으로 찍어보았다.


밥을 먹고 난 후

노곤함과 함께 개운함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힘들고 고된 하루 끝을

잘 마무리하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었던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완료다.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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