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장례식에서 불안을 느껴 하이데거에게 묻다.
얼마 전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암이었다. 처음에는 요새 건강과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별거 아니겠거니 하다가 암 진단을 받았다. 투병생활을 하면서 소식이 뜸해지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나도 먹고사느라 바빠서 생각날 때만 단톡방에서 "힘내라, 이겨낼 거야."와 같은 상투적인 얘기만 했는데... 장례식장 영정사진에는 환하게 웃고 있다. '새끼.. 뭐 하러 이렇게 일찍 갔냐. 나쁜 놈...' 화장기 없는 제수씨 눈이 퉁퉁 부어있다. 아이도 이제는 조금 뭘 아는지 조용히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다. 부모님은 체념한 듯 앉아 계신다. 친구들이 모였다. 다들 오랜만이다. 씁쓸한 표정, 서로의 안부를 대충 묻고 넘어가지도 않은 밥을 욱여넣는다.
연신 밖에서 전화받고 왔다 갔다 하는 친구가 묻는다. "야, 언제까지 있을 거야?" 일이 바쁜지, 집에서 빨리 오라는 지 자리를 뜨고 싶은 눈치다. 냉정한 녀석.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지. 제수씨에게 내일 한 번 더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친구들과 장례식장을 나선다. 아차, 친구 아이에게 용돈 조금 쥐어주는 걸 잊었다. 구두가 구겨진 채로 장례식장에 가보니, 황량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는데. 조화도 몇 개 없고 썰렁하다. 친구들과 나가서 담배를 피운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걔 담배도 안 폈잖아."
"야. 다 스트레스 때문이지. 잠도 못 자고 혼자 일하더니."
"아냐. 원래 암은 다 유전이지."
"그나저나 보험은 들어놨으려나 모르겠네."
"다들 건강검진 잘 받아라."
시답잖은 얘기하다가 흐려지는 연기처럼 또 뿔뿔이 흩어진다. 또 누구 장례식장에서 모이려나. 누구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장례식장에서 모이려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뭔가 헛헛하다. 친구가 그리워서? 제수씨가 안타까워서? 아니면 인생이 허무해서? 문득 나한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두렵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죽음을 떠올리지만, 살다 보면 잊어버린다. 그저 영원히 젊을 것 같았고, 영원히 살 것 같다. 부모님도 영원히 계실 것 같았는데. 이제 슬슬 친구 부모님의 부고 소식이 자주 들린다. 집에 돌아오니 새삼 아내와 아이가 고맙다. 밤에 혼자 누워 생각한다. '죽음. 아직은 괜찮지만 언젠가는 죽겠지. 갑자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병에 걸릴 수도 있지. 내가 죽으면 아내와 얘는 어떡하냐. 생명보험이 있었나' 나의 장례식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한 방울 또르르 흐른다. 세상 고민이 모두 쓸데없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이직, 상사와의 다툼, 아이 숙제, 은퇴 후 삶 무엇이 중요할까.
아침에 일어났지만, 우울한 감정이 가시지 않는다. 그날 저녁 잠깐 장례식장에 들렀다. 여전히 절간 같은 장례식장. 아이 머리 한 번 쓰다듬고 나와서 장례식장 앞 벤치에 털썩 앉는다. 누군가 옆에 앉는다. 검은색 정장에 중절모를 쓴 노신사. 나의 침울한 표정을 읽었는지 말을 건다.
하이데거: 죽음이란 참 묘하지. 삶을 깨닫게 해 주니 말이야.
나: (경계하며) … 제 친구가 죽었어요. 내일 발인이구요. 뭔가 삶이 허무하네요. 죽음을 보고 나니, 내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죠.
하이데거: 허무? 허무가 아니야. 허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지. 자네는 이 아무 의미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하고 불안한 거지. 친구의 죽음이 자네에게 큰 불안(Angst)¹을 가져다줬군. 그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야. 이제 스스로 삶의 의미, 나라는 존재를 묻기 시작했다는 신호지. 평소엔 바쁘게 살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죽음을 통해 드러난 거야.
나: 맞아요. 그냥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막하네요.
하이데거: 맞아. 그건 '공포'가 아니라 '불안(Angst)'이야. 공포는 실직, 교통사고처럼 대상이 있지. 불안은 달라.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존재의 감각이지.
나: 그런데 결국 다들 그냥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잖아요. 저도 그렇게 될 것 같고요. 며칠 지나면 회사일과 아이 학원비에 치여서 살겠죠 뭐.
하이데거: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 나는 그걸 그냥 세상 사람들(Das Man)²이 사는 방식이라고 부르지.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생각 속에 숨어 사는 거야. 사람들은 죽는다는 걸 알아야, 거꾸로 '산다'는 게 뭔지 제대로 물을 수 있게 되는 거지. 살아가는 게 아냐. 죽어가는 거지. 아니다. 죽음을 마주하면서 사는 거지.
나: 죽음을 계속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건가요? 너무 우울한데요?
하이데거: 죽음의 우울함을 떠올리라는 게 아니라,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거야.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세상, 이 현실 속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³야. 피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 그래야 삶의 매 순간을 더 진지하게 대하게 되지.
나: 근데 현실은 너무 바쁘잖아요. 일하고, 아이 키우고… 그 속에서 이런 죽음이나 철학이니 하는 생각은 하긴 어렵죠. 결국 또 잊어먹을거고요.
하이데거: 맞아, 일상이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가니까. 그래서 중요한 건, 순간순간 떠오르는 ‘왜?’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 거야.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건가?’ 하는 질문 말이지.
나: 그러다 정신병 걸릴 것 같은데요. 요새는 ‘진짜 나’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데요.
하이데거: 자네가 지금 묻고 있잖아. 그게 이미 시작이지. 대부분은 아예 묻지도 않아. ‘진짜 나’⁴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그렇게 묻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야. 내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⁵란 바로 그거지.
나: 헷갈리는데.. 그러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네요? 그냥 막 뭘 사는 플렉스나, 카르페디엠 같은 것과는 다른 건가요?
하이데거: 완전히 다르지. 플렉스는 진짜 내가 아닌 그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거지. 과시하기 위해 남들을 따라 사는 삶이야. 카르페 디엠? 난 그냥 현재만을 살라고 하지 않아. 죽음을 마주 보면서 네 삶을 관통할 의미를 네가 찾으라는 거지. 그 '의미'에 따라 단지 매 순간 ‘이건 내가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자, 바로 ‘진짜 나'를 사는 거지.
나: 그런데 그런 선택조차도 사실 세상이 정한 틀 안에 있는 거 아닐까요? 내가 진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선택했다고 믿지만, 그게 정말 나의 생각일까 싶은데요.
하이데거: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네. 맞아,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³야. 언어, 가치관, 문화, 모두 이미 주어진 틀 속에 있지. 하지만 그걸 자각하고 묻기 시작한 순간, 자네는 그 틀 안에서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거야. 완벽하게 세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순 없어. 우린 그물 속에 던져진 물고기 같으니까. 하지만 그물 안에서도 퍼덕이며 방향을 바꾸려는 물고기가 있고, 그냥 죽은 듯이 끌려가는 물고기가 있지. 그 '퍼덕임' 자체가 결단⁶이야.
나: 만약… 제가 결단해서 선택한 길이 가족을 힘들게 하거나,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요? 그건 어떻게 책임져요? 저 혼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가족이나 직장을 신경 안 쓸 수는 없잖아요.
하이데거: 좋은 질문이야. '진짜 나'로 산다는 건 혼자 섬처럼 사는 게 아냐. 우린 근본적으로 타인과 함께 있는 존재(Mitsein)⁷야. 그래서 우리 존재의 근본 구조가 바로 '걱정(Sorge)'⁸인 거지.
나: 걱정이요? 친구 죽고 나서 가족 걱정, 내 미래 걱정… 이런 것들이 떠나질 않아요. 이것도 세상사람들이 사는 방식의 일부인가요?
하이데거: 아니, 그건 걱정(Sorge)⁸일세. 단순한 근심과는 달라. '걱정'은 우리 존재의 근본 구조야.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도구 걱정), 타인과 함께 살아가고 (타인 걱정), 나 자신을 돌봐야 하지 (자기 걱정). 자네가 가족을 걱정하는 건, 자네가 세상과 타인과 연결된 존재라는 자연스러운 증거야.
나: 그럼 그 걱정 때문에 제 결단을 망설이는 건 당연한 거네요?
하이데거: 당연하지.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야. 그 걱정을 '남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거나, 혹은 두려움 때문에 회피하냐. 아니면 '진짜 나⁴로서 그 걱정까지 끌어안고 결단⁶하느냐의 차이야. 자네의 선택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까지 고려하고, 그 결과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는 것. 그게 진짜 어른의 결단⁶이지.
나: 그런데 혼자 그런 결단을 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외로울 것 같아요.
하이데거: 본래적인 삶이 고립을 뜻하는 건 아니야. 나는 인간을 ‘세계-안에 있는-존재(In-der-Welt-Sein)’⁹라고 했지.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 속에 함께 존재해. 중요한 건, 그들을 피해야 할 세상 사람들²처럼 보는 게 아니라, 나처럼 진짜 존재로 존중하는 관계를 맺는 것. 아까 얘기한 그걸 걱정(Sorge)⁸이라고 한 거지.
나: 아까 말한 걱정과 다른가요?
하이데거: 단순한 걱정이 아니야. 서로를 진짜 존재로 바라보고, 그 존재가 자기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태도지. ‘나도 나답게, 너도 너답게’ 살아가게 하는 관계. 그런 공존이 본래적인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야.
나: 그러니까 결국 ‘진짜 나’⁴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결국 다른 사람과 공존하면서... 스스로 질문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계속 살아가는 존재라는 거군요.
하이데거: 맞아. ‘진짜 나’⁴는 결과가 아니야. 과정이지. 계속 묻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 자네가 지금처럼 계속 묻는다면,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는 거지.
나: 뭔지 감이 오는 것 같아요. 죽음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을 제대로 살아보라는 말이네요. 그래도 좀 어렵네요, 뭔가 답이 없다는 느낌도 들고요...
하이데거: 나도 답은 몰라. 철학자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제대로 던지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야. 답이 없는 것 같다고? 그거 아주 좋은 상태야. 적어도 자기가 답을 모른다는 것은 아니까. 대부분은 답도 모르면서 정답을 안다고 착각하며 살거든.
일단 이 불안을 견뎌내 보게. 도망치지 말고. 그 불편함 속에서, 자네가 '남들'의 시선 때문에, 혹은 그냥 편해서 해왔던 일들, 만나왔던 사람들, 했던 생각들을 죽음의 눈으로 다시 한번 비춰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만은' 하고 싶은 게 떠오를 걸세. 그게 작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게 자네의 '진짜 나⁴'로 가는 실마리가 될 거야. 자, 이제 택시라도 잡아야지 않겠나? 밤이 깊었어.
불안했다. 사실 죽으면 끝 아닌가. 허무하다. 난 종교도 없고 사후세계도 안 믿는다. 그저 이 주어진 삶에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뭐 직장은 좋아하는 일 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감당하며 살아가는 거. 그게 뭐 평범한 삶이고, 이 평범한 삶에서 소박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허무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이렇게만 살아도 되는 걸까. 난 곧 죽는데? 없어지는데? 내가 타고 있는 택시가 타고 가다가 사고 나서 죽으면 난 사라지는데?
허무하고, 뭔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들었다. 마치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사라지니 허무하다고 해야 하나. 정신없이 앞을 따라왔는데 결국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혼자 있는 기분이랄까. 나침반도 없고, 누구도 없다.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막연하다. 나를 둘러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지워봤다.
내가 좋아하는 일? 그것도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 유행을 따르니까, 혹은 일시적인 감각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단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었나? 잘하는 것? 그렇다고 믿어온 건가? 아니면 내가 존재의 이유를 그것으로 정한 건가? 묻다가 내린 결론. "모르겠다."
외로우면서도 묘하게 힘이 생겼다. 어차피 내가 스스로 삶을 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책임지는 것. 내가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방향도 없는 황량한 들판이라면, 내가 길을 정해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남들이 우르르 몰려간 길, 모두가 맞다고 생각한 그 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내가 결단하고, 내 자체가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내가 정하고 내가 책임진다. 하지만 나에게 맞고, 의미를 주는가? 문득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 등을 쳐다보면서 막 뛰다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애초에 정답이란 없다. 길은 내가 정한다. 다 같이 뛰는 와중에 홀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본다.
1. 불안(Angst):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은 단순히 무언가에 대한 '공포'와는 다르다. '공포'는 실직, 질병, 사고처럼 구체적인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특정한 대상 없이 우리 존재 자체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감정이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임을 깨닫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사실을 직면할 때 드러난다. 이 불안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묻게 하고, '진짜 나'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중요한 신호다.
2. 세상 사람들(Das Man): '세상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대로' 살아가는 비본래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탐구하기보다, 대중적인 의견, 사회적 관습, 익명적인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생각에 휩쓸려 살아간다. 세인의 삶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자신의 '진짜 나'를 망각하게 만든다.
3.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 어떤 환경, 어떤 몸으로 태어날지 아무도 선택할 수 없었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던져진' 상태를 하이데거는 '내던져진 존재'라고 부른다. 이 불가피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4. 진짜 나(본래적 자기): 하이데거에게 '진짜 나'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존재'를 묻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책임지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다. 이는 '세인'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유한성을 직면하고 죽음을 의식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는 삶을 의미한다.
5.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단순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미를 되묻고 '진짜 나'로 살아가도록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가능성이다. 죽음을 직면할 때 우리는 삶의 유한성과 소중함을 깨닫고, 매 순간을 더욱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게 된다.
6. 결단: '결단'은 '세인'의 삶에서 벗어나 '진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행위다. 이는 단순히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능성을 스스로 책임지고 실현하겠다는 의지적 행위를 의미한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바로 결단이다.
7. 타인과 함께 있는 존재(Mitsein): 하이데거는 인간이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항상 타인과 함께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 얽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8. 걱정(Sorge): 하이데거의 '걱정'은 일상적인 근심이나 염려를 넘어선, 우리 존재의 근본 구조를 의미한다. 이는 '세계-내-존재'로서 우리가 세상과 관계 맺고, 타인과 함께 존재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 방식 전체를 포괄한다. '걱정'은 단순히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진짜 나'로 살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책임을 동반하는 것이다.
9. 세계-안에 있는-존재(In-der-Welt-Sein):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세계 안에 놓여 있는 객체가 아니라, 세계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될 수 없으며, 세상 속에서 다양한 도구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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