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배낭에 짊어진 것이 내 업보다.
힐링의 도시 치앙마이.
도시 옆에 힐링이 붙는 대표적인 곳에 한 달 살기를 하러 떠나면서도 나는 노트북, 아이패드, 스플릿 키보드에 여분으로 무접점 키보드까지 들고 갔다.
vacation이 아니라 work-cation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수하물 규정 15킬로를 딱 맞췄던 캐리어 무게에서 옷보다 글쓰기 장비 무게가 더 많이 나갔을 것이다.
그걸 숙소에만 두고 다녔냐?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불행하게도 나는 한 군데에서는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노마드 소울, 한국식으로 말하면 역마살이 낀 몸이기 때문에 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녀야 했다.
따라서 여행을 다니면서도 멋쟁이 크로스백은 손가락 관절염 위협을 받고 있는 전업작가에겐 사치.
검은색 백팩에 노트북, 노트북 받침대, 스플릿 키보드 (반으로 쪼개져 있으므로 2개다), 팜레스트 (반으로... 2개다), 버티컬 마우스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다.
그렇게 배당을 맨 채로 카페를 전전하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결국 숙소 근처에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에 등록했다.
그때 당시 일과 생활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프리랜서의 고질적인 문제에 (또!) 시달리고 있었기에, 코워킹 스페이스에 올 때만 일을 하고 나머지는 일 생각을 잊고 푹 쉰다, 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원래 장소를 바꾸면 일이 엄청 잘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슬럼프를 겪고 있는 창작자가 있다면 장소를 바꿔보는 걸 추천한다.)
그렇게 뿌듯하게 일을 마친 후, 개인 락커에 짐을 맡길 수 있어서 백팩은 그곳에 두었다.
그렇게 코워킹 스페이스 등록 첫날.
백팩을 두고 나와 거리를 걷는데....
세상에.
맨날 걷던 이 거리가 왜 이렇게 홀가분하게 걸어지는 건지!
길가에 한아름 핀 다홍색 이름 모를 꽃들도 예쁘고, 아무리 건기라지만 여전히 덥게 느껴지던 날씨도 너무나 좋고. 햇빛도 좋고.
그렇게 가벼운 몸으로 한참을 걸어 다녔다.
똑같은 치앙마이. 같은 님만해민 거리인데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바로 내 등에 무거운 짐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때 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아, 키보드...!
아아, 글쓰기!
스페인에 있는 유명한 순례길.
그곳의 순례자들은 자신들의 배낭 짐을 '업보'라 부른다고 한다.
처음엔 순례자들도 최대한 가볍게 짐을 꾸린다.
하지만 편리함에 찌든 현대인들은 포기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샴푸, 바디워시, 얼굴용 폼클렌징부터 시작해, 옷도 빨래할 걸 생각하면 최소한 서너 가지는 있어야 하고...
이렇게 짐을 싸다 보면 아무리 비워도 '사람이 이 정도는 있어야지'하는 것들로 배낭이 무거워진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딱 하루만 순례길을 걸으면 그 짐이 반으로 준다고 한다.
전부 다 꼭 필요해서 추리고 추린 것들인데도 말이다.
샴푸, 바디워시, 폼클렌징은 모두 한 조각의 비누 하나로.
옷은 통풍 잘 되고 잘 마르는 옷가지 두 개로.
긴 여정 길을 걷고 걸을수록 짐은 점점 더 줄고 줄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욕심을 버릴수록 몸은 더 가벼워지고, 그리고 그래야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나는 평소에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등에 매고 다니는가?
왜 홀가분한 맨 몸으로 가볍게 이 길을 걷지 못하는가?
내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업보다.
그것은 내 아이를 위한 기저귀 가방이 될 수도, 반려견을 위한 똥 봉투가 될 수도, 완벽한 화장을 위한 수정용 화장품이 될 수도, 나처럼 키보드가 될 수도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여행 짐을 싸다 보면 내가 무엇을 포기 못 하고 무엇에는 욕심이 없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예전에 나는 한 달 여행을 가면서도 화장품 가방 (파우치가 아니다. 가방.)을 한 아름 챙겨 같이 간 친구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한창 외모에 집착하던 24세였다. 그때의 나의 업보 중 하나는 외모였던 거지.
글쓰기. 그것이 내가 등에 이고 지고 가야 하는 현재 나의 업보다.
당장 벗어던지지는 못하겠지만, 굳이 일을 하지 않을 때에도 그걸 짊어지고 다녀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가볍게 걷자.
오늘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tmi.
하지만 한국 스벅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또 그 검은색 백팩에 스플릿 키보드를 바리바리 들고 왔다... 업보 던지기 쉽지 않다.
tmi2.
나는 늘 그렇게 옷가지가 부족하다..
매번 부족해서 이번엔 넉넉하게 가져가자고 다짐하는 데도 결국 부족하게 된다.
제일 욕심이 없는 게 옷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나이가 3n살인데도 매번 백팩에 에코백만 들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