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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의 롤모델의 롤

「희극의 파편」 번외 - The role of LOL model

by 재준
출처 : lck 채널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시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접어두고 번외 편으로 돌아왔습니다.


희곡의 대사 한 조각, 장면 하나를 붙잡고 들여다보는 「희극의 파편」 시리즈를 연재하며

저는 오래된 감정의 표면을 꾹꾹 눌러보고, 웃기면서도 아픈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파편을 감정적으로 응시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패턴의 방식은 어느 순간 정해진 틀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을 갖추는 건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스스로 갇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중간중간 번외편을 연재하여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고자 합니다.


‘희극’이라는 단어는 꼭 희곡이 아니라도 우리 삶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이 번외편은, 그 흩어진 희극을 줍는 작은 산책입니다.
가볍고, 조금은 무계획적이며, 말보다 여운이 많은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웃을 준비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ㅎㅎ 그냥 바라보면 됩니다.


오늘 번외편은 '비범한 수행성'에 관한 제 평소 생각을 게임 마우스 클릭과 관련해서 적어보았습니다. 그냥 저만의 넋두리입니다.^^


비범한 수행성

-사거리 표시를 끈다는 선택을 중심으로




1. 고정관념을 한번 생각해보기


롤에서 모든 캐릭터는 평타를 칠 수가 있고 A키를 누르면 그 사거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평타'란 일반 공격, 즉 QWER을 누르면 발동되는 별도의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챔피언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격 기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챔피언은 적 챔피언한테 평타 공격을 맞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만 적 챔피언을 평타 공격으로 때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죠? 그래서 대부분의 유저는 A 평타 사거리를 활성화하며 끝사거리(원형 테두리)에서 평타를 치곤 합니다. 무빙을 자칫 잘못해서 상대방 평타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30분 (게임 평균 시간) 내내 거리조절을 합니다.


현재 리그오브레전드의 챔피언 개수는 167개이며 각 챔피언마다 사거리가 천차만별입니다. 자신의 챔피언이 적보다 사거리가 짧다면 기민한 거리조절 능력이 필요합니다. 보통 사거리가 짧은 챔피언은 이동기로 단번에 적에게 근접할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 챔피언이 방심하며 자신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A키의 사거리 표시는 모두가 기본값처럼 받아들이는 설정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거리 표시를 위해 A를 누르고, 평타를 치기 위해 마우스 좌클릭을 하고, 평타에도 딜레이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마우스 우클릭으로 잠시 뒤로 빠졌다가, 다시 A키를 누르고 마우스 좌클릭을 합니다. 그 짓을 계속 반복합니다.




2. 그 허물에서 벗어나기



그런데 간혹 A 사거리 표시키를 끄는 유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다운로드 (4).jpg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現 LCK의 한화생명e스포츠 소속 바텀라이너


원거리딜러 포지션 선수들 중 가장 압도적 피지컬을 자랑하는

박도현 (닉네임: Viper, 바이퍼) 선수입니다.


원래 바이퍼 선수도 A키 사거리표시를 켠 채로 플레이했다고 하는데요.

2022년 8월경 그가 중국 Edward Gaming팀으로 이적하게 됐을 때 일입니다.

우연찮게 사거리 표시를 끄게 되었는데 게임이 더 잘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 그 전까지 그는 지독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습니다. 소속팀 그리핀이 2군으로 강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중국 팀으로 떠난 뒤 무언가의 깨달음을 얻고(?) 당당히 롤드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단숨에 세계1등이 된 것입니다.




3.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


편리함이라는 말은 때때로 사람을 게을리 만들기도 합니다.

마우스 커서 아래 생기는 원 하나에 모든 책임을 던져두는 일, 예측을 도와준다는 착각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은 감각적인 무언가를 계속해서 외면하는 행동이 될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발견이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


게임은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특히 롤이란 게임은 0.5초만 멈춰있어도, 치명적인 손해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 원거리딜러 포지션 (사거리는 길고 체력은 별로 없는, 데미지는 엄청 강한데 몸은 약한 챔피언들이 태반인 포지션) 유저들은 그 순간의 중요성을 더 크게 체감할 것입니다.


여기서 잘하는 원거리딜러와 못하는 원거리딜러가 갈리게 됩니다. 롤은 5:5 게임이고 적팀 5명 모두가 '원거리딜러 먼저 죽이기'를 1순위로 하고 싸움을 걸기 시작합니다. 한 챔프당 스킬은 4개(QWER)이고 그럼 총 20개의 스킬을 원거리딜러에게 퍼붇기 시작합니다(이론상). 기계가 아닌 사람인 이상 모든 스킬을 피할 순 없습니다. 위협적인 스킬을 대비하고 예측해서 피할 순 있으나, 1초마다 싸움 구도가 갈리는 상황 속에서 모든 걸 예측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잘하는 원거리딜러들은 그 예측 밖 범위의 상황을 직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일명 스킬을 '보고 피하기.' 그 스킬은 예측도 아니고 계획된 일도 아니었습니다. 가령, 페르시아군이 수천 발의 화살을 날리자, 스파르타 병사들이 방패를 든 채로 말합니다. “Then we will fight in the shade.” (그렇다면 우리는 그 그늘에서 싸우면 된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서 화살이 솟아올라 똥구멍을 찌르려고 합니다. 그것을 바로 피할 수가 있나요? 그것은 단순히 재능의 영역일까요? 동체 시력의 문제일까요?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못하면 그 사람은 평생 못하나요?



4. 깨끗함의 미학


생각하지 마라. 느껴라.

-브루스 리


저는 사거리 표시가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고 모든 롤유저들에게 감히 알립니다. 단순히 A키를 누르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평타 사거리가 계속 화면에 거슬리게 떠있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 습관이 자칫하면 무의식적으로 끝사거리에서만 평타를 치려고만 해서(그것에만 신경쓰느라) 오히려 과감히 앞으로 들어가야하거나 중요한 스킬을 피하거나 5:5 싸움 때 전체적인 구도를 파악해야 할 때 제약이 걸릴 수 있습니다. (평타 한 대를 못 때려서 적팀이 한 틱으로 살아갔을 때 더욱 더 실감이 날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거리 표시를 켜지 않았을 때, 깨끗하고 심플한 화면에서 높은 고점의 퍼포먼스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스포츠도 결국 스포츠입니다. 게다가 수행성을 중시하는 게이머들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랬을 때 화면이 너무 복잡하거나 어지럽게 플레이하면 반응성과 즉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철학, 예술, 과학이든 어떤 분야에서든 통용되는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감각이 둔화되고, 순간적인 판단을 못하게 하고 몰입과 직접적 감각을 가로막게 합니다.



5. 도대체 창의적인 사람이란


롤에 진심일 땐 바이퍼 선수 개인화면 영상을 자주 보곤 했습니다.

그 선수를 보고 느낀 점은... 그냥 말이 없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채팅을 치지도 않고, 굉장히 리드미컬하고 본인의 무빙과 스킬샷에만 몰두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마라도나가 몸푸는 것(출처: CloudyDay채널)처럼 말입니다. 공을 보고 자기 리듬을 타야하는데 감히 채팅을 칠 시간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Y가 태어나기 위해 X는 죽어야 한다.'


목표의 차원을 달리 할 때, 그 한 끗의 킥이 남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감각의 Y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 시각의 X를 죽이는 일이어야 합니다.


게임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그 자리 그 순간에 깨끗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좀 웃기네요.ㅎㅎ)

화면을 부드럽게 혹은 약간의 공백을 염두에 두고 플레이하면서, 그 여백으로 정보의 속도를 높이면서.. 자신의 그 안쪽에서 올라오는 본성의 무언가로, 무언가의 감각을 채우는 느낌으로 해야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테스트해본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해야 우상향스러운 실력 그래프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A키를 누르지 않고 일주일 정도 플레이한 제 영상을 한번 올려봤습니다.ㅎㅎ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때로는 불균형과 히스테리를 인정할 것, 그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것을 탐색해서 스스로 익숙해질 것, 그래서 결국은... 안정을 찾을 것, 남의 시선을 초월하는 어떠한 집중 포인트는 리듬과 느낌과 직관의 세계일 것, 그 리듬의 영역에서 대화할 것, 그것이 세계라고 믿을 것, 스스로의 한계를 꾸준히 측정해보고 싶어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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