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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갈나무 Oct 11. 2023

14.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배워

세대차이라는 말을 처음 실감할 때가 언제였을까? 부모님의 답답함에 남몰래 고개를 흔들던 나의 눈빛이 내 아이들의 얼굴에 깔리는 당혹스러운 순간의 침입을 생각해 봤니? 이번엔 세대차이 x문화차이라는 굵직한 장애물이 실제로 떡하니 내 집안에서 버티던 때, 그러니까 학교나 학부모, 친구들이 아닌 우리 집에서 있었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


우린 두 아이 모두 캐나다에서 사춘기를 겪었지. 어디에서든 요즘 아이들의 사춘기는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들 말하는데, 세대 간의 차이에 문화의 차이까지 곱해진 ('덧셈'이 아니라 '곱셈'임을 기억해 줘) 우리 가정의 그 드라마틱한 기간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그 시작도 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사다난했어. 눈 뜨면서 눈 감는 시간까지 지속되는 일이었던지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게 '아이들에 대한 커다란 애잔함'이 있었다는 거야. 아이들이 겪고 있던 외로움과 서러움이 지나치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매일 나도 아팠거든. 그래서 어느 정도의 GR은 대부분 이해해 주고 넘어갔지. 그렇게 되더라고. 모든 것이 헷갈리는 고된 일상을 날마다 보내는 아이들이 딱하고 안쓰러워서. 그래도 사춘기는 사춘기잖아.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외계인이 술이 떡이 된 채로 2년간 우리 집에 하숙 중이다... 를 대뇌이며, 아이들이 보여주는 신묘막측한 버라이어티쑈에 날마다 초대되던 시절. 차마 그 황당한 에피소드들은 아무리 필명으로 글을 올리는 브런치라 해도 풀지 못하겠음을 이해해 주길.


하지만 매번 양보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늘 전쟁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 있으니, 바로 '예의'였지. 유교 사상의 표본으로 자란 나의 기준에 캐나다 십 대의 언행은 오만불손 그 자체였어. 친구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자기 이름을 부르게 한다며 아이 친구들이 어느 날부터 나를 '미시즈 초이'가 아닌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어. 우리 아이들의 요구였지. (매번 내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해서 결국엔 내 이름 앞에 '마마'를 붙여서 '마마 oo'로 부르게 했지만.) 품위 있고 차분하게, 요점만 짚어서 짧게 야단을 치려는 나의 다짐을 번번이 박살 내던 건 동그랗게 뜨고 내 눈을 보는 아이들의 당돌한 시선과,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한 마디도 지지 않으며 자기 의견을 어필하는 고놈의 '주둥아리'였어. 아, 고놈의 '마미, 아이 돈트 띵크 소.'


내가 자란 배경과 다른 곳에서 아이를 키울 때 내가 정말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걸 깨달았지. 함께 왔으니 나도 새로 배우는 게 당연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거야. 다른 문화와 그 기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배우고 돌아오는 아이에게 고집스럽게 '한국의 예의'를 강요할 수는 없었어. 아이에게 집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주지 않으려면 나도 배우고 변해야 하더라. 나의 예의가 아이에겐 넌센스로, 내 눈에 보이는 아이의 '싸가지'가 아이에겐 당연히 존중해야 하는 '기본'이 되는 충돌의 한마당에서 언제까지고 널뛸 수는 없잖아.


새로운 문화는 그곳의 현지인들에게 배워야 했어. 비슷한 갈등을 겪으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한인 가정에서는 오답노트밖에 얻지 못하더라고. 이미 '현지화'가 된 한인 가정은 우리에게 시간을 내주기 어려웠고. 아이들이 뒹구는 세상, 아이들이 살고 있는 문화를 배우는 게 직선코스였어. 나는 오만가지 '수다 거리'를 찾아서 앞집 아줌마네, 옆집 할아버지네, 동네 젊은 부부에게 소소한 일상들을 털어놨어.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귀에 담았지. 아이들에게도 계속 요청했어. 엄마도 가르쳐달라고.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나의 기준이 유연해지자 아이들도 나와 진짜 소통을 하기 시작했어. 꼭 필요한 정보 전달에서 벗어나서 의논도 하고, 설루션도 물어보고, 친구들 이야기도 전해주고,  또 고민도 털어놓고.


맥주나 마리화나 이야기는 앞에서 잠깐 했고, 이성교제나 성적인 문제, 동거나 동성애 문제, 북한과 일본 등에 대한 민감한 이념 문제 등, 나와 완전히 다른 결의 정보를 쉴 새 없이 듣고 배워오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과연 어느 선까지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 혹은 아이들은 내가 어느 수준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는 결코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야. 나와 아이의 의견이 전혀 다를 때, 아이는 '부모님의 의견은 전적으로 존중한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그와 다르며, 그런 나의 의견도 존중해 주시길 바란다'라고 아주 당당하게 민주적으로 요구하는데, 그럴 때 나는 나의 '화'를 어디까지 참고 숨길 수 있는지, 혹은 말이 통하지 않는 부모를 자청하며 70년대의 우리 부모님이 내게 그리하셨듯 나의 기준을 강요하며 밀어붙일 것인지, 매 순간 당황했어. 특히 우린 어른이 말씀하실 땐 눈을 살짝 아래로 '깔아야 한다'라고 배운 세대인데, 똥그랗게 두 눈을 뜨고 내 눈을 바라보는 그 얼굴도 처음에 나는 일종의 반항으로 느껴지더라고.


이쯤에서 보니, 내가 네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한 마디로 '부모도 배우러 가는 거다'인 것 같아. 영어 하나 배우자고 유학이나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테니, 아이가 언어와 함께 그 문화를 받아들여올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외국에서 부모와, 또는 어른과 소통이 되지 않는 순간 아이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더라는 것, 그러니 아이와 함께 부모 역시 새 노트를 장만해서 함께 배워야 한다는 것. 나는 가끔 아이와 함께 외국에 나간 엄마들이 매일 골프를 치러 다니고 쇼핑을 다닌다는 소리를 들으면 화도 나고 걱정도 되고 그렇더라. 아니, 백지에 새로 그리는 아이보다 알던 것 뒤집어엎고 새로 배워야 하는 엄마가 함께 할 일이 얼마나 많고 바쁜데, 그 중요한 시간에 놀러 다닌다는 건가 싶어서. “태어날 때부터 엄마만 두 명인 친구네가 새로 남동생을 입양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엄마?”라고 아이가 물을 때,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의견을 세련되게 전달하는 동시에 아이가 나와 대화를 멈추지 않게 하기가 얼마나 어렵다고. 그러니 아이와 조기 유학을 간다면 아이의 사춘기가 오기 전에 내가 알던 법 잠시 젖혀놓고 새로운 로마의 법을 마스터하기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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