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송당리 여행 - 다짐
시릴 정도로 차지 않고 미세먼지는 거의 없는,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고작 이틀 밤을 지냈는데도 민트 방에서 짐을 꾸리는데 아쉬움이 들었다. 다음에는 따뜻한 방에 누워, 속닥속닥 소곤댈 수 있는 친구와 오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방을 나섰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비자림으로 향했다. 황량한 겨울바람에 유난히 초록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아마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거 같다. 가족 혹은 연인끼리 제법 많은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길을 걸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정해진 루틴을 따라 그저 걷는 행위는 참 평안했다. 굳은 기세를 간직한 수백 년 된 나무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단단히 흙을 밟고 또 밟으며 유난히 딸 생각이 많이 났다. 보다 자연과 가깝게 키우고 싶다는 지향은 있지만, 이 또한 서울살이에서 부모의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점점 무난한 선택이 많아진다. 마음속 작은 약속을 조금 더 다질 뿐이다.
비교적 인근에 있는 관광지 중 만장굴도 다녀왔다. 꽤 깊고 넓어 내게는 약간의 폐소 공포도 불러온, 관광지라기보다는 체험지 같았던 곳이다.
이틀 동안 주로 버스를 이용했고, 가까운 곳은 택시 앱으로 부른 택시를 탔기 때문에 별다른 불편한 점은 없었다. 다만 관광지를 정차하는 순환버스 등의 경우, 운행 차량이 한 시간에 한 두대에 불과해 좀 더 배차간격이 짧으면, 뚜벅이 여행자에게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를 떠날 시각은 점점 다가왔고 짐을 찾으러 다시 송당리를 찾았다. 송당리에 온 첫날부터, 눈여겨봐 두었던 카페 겸 술집이 있었다. 왠지 이곳이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행처가 되면 어울릴 거 같았다.
술과 식물의 조합. 나로서는 거의 최상의 공간이었다. 오래된 건물의 고즈넉함과 초록 특유의 생동감이 어우러져 편안하면서 모던하게 다가왔다. 또한 필립 로스의 소설을 비롯하여, 몇 가지 책들이 있어, 더욱 호감 가고 궁금한 곳이 되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서 무척 배가 고팠는데, 적은 양의 저렴하고 다양한 안주들이 준비되어 있어 나와 같은 혼술자에게는 딱 적합했다. 정갈하고 맛있는 안주들을 뱅쇼와 곁들여 먹었다. 뱅쇼는 알코올이 휘발된 와인이지만, 그 풍미만은 어지간한 술을 압도한다고 생각하던 차, 조금씩 비까지 내렸다. 알코올은 흡입하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취해, 혼자 먹고 마셨다. 좋은 곳에서 호기롭게 즐기는 몇 십분 남짓이 행복했다.
이상한 취기(?)에 여유를 부리다가 부랴부랴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찾고 공항으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분께서 우산까지 내주셨다. 재회를 예비한 유쾌한 이별 인사를 나눈 후, 송당리를 떠나올 수 있었다.
물론 제주 공항에서 사람들에 치이고 연착을 겪었지만, 여행의 감흥을 퇴색시키진 못했다. 이미 다음 여행지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아마도 다음엔 딸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