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건 언제나 놀이
지난 명절, 하동 삼성궁에 다녀왔다. 삼성궁 후기에 어떤 분이 눈 내린 사진을 올리셨기에 혹시나 했는데 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눈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내가 사는 경남은 여간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데 올해는 경남 전역에 눈 소식이 진짜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새하얀 겨울왕국이 될 정도로 쏟아붓는 곳은 없었기에 눈 내린 삼성궁은 퍽이나 감격스러웠다.
겨울왕국이 된 삼성궁은 너무나 아름다웠으나, 삼성궁은 나름 산행을 해야 하는지라 눈이 꽤나 많이 온 이 상황에 과연 입장해도 될는지 망설여졌다. 방금 막 구경을 마친 관광객 몇 팀을 붙들고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눈 때문에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서 코스의 반만 갔다는 팀도 있었고, 볼 거 하나도 없고 순 돌덩이 밖에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팀도 있었다.
"가? 말아? "
애들도 춥다고 찡찡대고 어른 둘에 아이 둘 입장료도 24,000원이라 살짝 고민이 됐지만 2여 년 전 여름에 왔던 하동 삼성궁이 너무 예뻤었던 지라 에라잇, 모르겠다. 일단 고다!!!
호오라~~ 망설인 순간이 무색할 만큼 하얀 눈에 휩싸인 삼성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칼바람에 온 얼굴이 빨개졌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바닥의 뽀드득 소리에 심장에 하트 불이 계속해서 켜졌다. 하지만 딸아이에겐 뽀드득 소리고 뭐고 눈을 동반한 칼바람이 원망스러울 뿐인가 보다. 추워 추워를 연발하더니 혼자서라도 내려갈 거라며 칼바람보다 더 매서운 얼굴을 하며 발길을 돌려버렸다.
딸아, 쪼금만 더 가면 돼
"쪼끔만 더 가면 돼. 쪼끔만 더 가면 정상인데, 거기가 진짜 이뻐. 엄마 오랜만에 거기 보고 싶은데 같이 가자"
"싫어, 엄마 혼자 가. 난 갈 거야~"
아무리 어르고 달래 봐도 말이 먹히질 않는다. 그렇게 몇 분을 씨름하다 문득 드는 깨달음 한 자락.
아이들은 목적지를 정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가는 내내 온갖 것에 자주 마음을 뺏기지 않는가.
빠알간 무당벌레에 시선이 뺏겼다가,
민들레 홀씨라도 만나면 꼭 입바람을 불어야 하고,
갑자기 나타난 놀이터에도 꼭 들렀다 가야 되고 말이다.
육아휴직을 오래 한 나는 아이가 삼천포로 빠질 때마다 '아이고, 또 시작이구먼' 하며 옆에서 기다려주는 상황이 익숙하였는데 남편은 그런 상황을 몹시 힘들어했다.
"OO아, 시간 없어. 어서 가자~ 바쁘다 지금." 어떻게든 1분이라도 빨리 목적지로 향하고 싶어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고 저런 하수~'하며 고개를 젓곤 했는데 눈 덮인 삼성궁 한번 보겠다며 어떻게든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내 모습에 '어, 나도 예전의 남편과 다르지 않네. 나 지금 하수 된 거야??' 하며 흠칫 놀라버렸다.
곧이어 '뭐시 중헌디'란 말이 가슴속에 떠올랐고 그 길로 남편에게 달려가 차 키를 받아와서는 딸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고 싶어 하는 딸아이의 마음에도 부응했겠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 버린 남편과 아들이 내려올 때까지 시간 여유도 있겠다 하산하는 길을 그저 즐겨보기로 했다.
앞서 다녀간 관광객이 만들어놓은 예쁜 눈오리를 갖고 놀기도 하고
2025년을 기약하며 글자도 새겨 넣기도 하고
바위에 줄을 죽죽 그어 혹등고래까지 만들어버렸다.
앗! 이것도 보셔야 한다.
누군가 눈 바닥에 누워 양팔과 다리를 열심히 위아래로 움직여 '천사 모형'을 만들어 놓고 갔다. 크아~ 이 정도 클라쓰쯤으로 놀아줘야 하는데! 탄성과 탄식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어느새 딸은 더 이상 차에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새하얀 눈과 나뭇가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동심이 가득 차 올랐다. 역시 어른이건 아이건 놀아야 살아나나 보다.
그렇게 딸아이와 둘이서 꽁냥꽁냥 거리고 있는데 남편과 아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야 벌써 다 보고 내려온 거야?"
"당연하지"
"정상도 갔어?"
"그럼. 당신 보여주려고 영상도 찍어왔으니 봐봐"
무조건 정상에 올라야한다는 열망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정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살짝 흔들린다. 하지만 몹시 흡족한 시간을 보냈기에 속상하지 않았다. 눈 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여 되려 더 좋았다.
벤치에 눈이 쌓여 봉긋하게 솟아오른 눈을 보며 남편에게 외쳤다.
"자기야! 저거 막 구워져 나온 대만 카스테라 같지 않아?"
"우와!! 진짜네 똑같다 똑같다!"
남편이 갑자기 화색을 띄우며 다가왔다. 그러곤 이내 등산 스틱을 들어선 대만 카스테라가 막 구워져 나왔을 때 점원이 하는 행동을 해댔다. 대만에선 대형 카스테라가 갓 오븐에서 구워져 나오면 대형 자와 대형 칼을 꺼내 들고 정확하게 길이를 재어서 잘라서 판다. 같은 추억을 가진 우리 네 식구는 신나게 웃어댔다.
그러고 보니 겨울왕국의 안나도 엘사가 마법을 통제하지 못해 서로 갑작스레 떨어지게 되었을 때도 아래와 같이 노래하지 않았나.
언니!
같이 눈사람 만들래?
제발 좀 나와봐
언니를 만날 수 없어
같이 놀자
나 혼자 심심해
그렇게 친했는데 이젠 아냐
그 이유를 알고파
같이 눈사람 만들래?
눈사람 아니어도 좋아
(저리 가, 안나)
그래 안녕..
겨울왕국의 엘사도, 지구별의 어린이도 어른도 우리 모두 놀이밥이 필요하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놀이터도 아이들이 들이닥치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어른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무엇이 필요할까 떠올려본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
어른들의 일터가 '놀일터'가 되면 어떨까.
네모난 책상과 네모난 의자에 앉아 있는 어른들의 몸을 깨우기란 여간 쉽지 않다. 오늘은 먼저 마음을 깨워보련다. 동료가 타준 맛있는 커피를 다 먹고 나서 난데없이 컵을 뒤집어본다. 냅다 눈, 코, 입을 그린다. 빠알갛게 볼터치까지 해서 동료에게 건네니 씨익 웃는다.
역시 우리는 놀이밥을 먹어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