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끝난 중2아들 녀석과 대학시험 끝난 예쁜 큰딸과 같이 가까운 곳에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고3 둘째 딸은 새벽 3시까지 연극영화과를 목표로 무용과 뮤지컬 연습으로 바빠 함께하지 못했다.
고3 딸 때문이라도 멀리는 못 가니 고3딸을 최대한 케어할 수 있도록 낮시간에만 휴가를 다녀오자 했던 것이다.
중2 아들은 체험학습을 신청했다.
자취방에 뒹굴던 큰 딸아이는 원래라면 금요일에 집으로 오는데 일찌감치 수요일에 왔다.
우리는 목요일 휴가 첫날 대전 성심당 빵집으로 가기로 했다.
중2아들이 잔뜩 기대를 했기도 하고 큰 딸이 빵순이라 다른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휴가 전 날. 수요일 저녁.
”내일 대전 갔다가 저녁 7시에는 영어 학원 가야 해 “
아들은 바로 수긍했다. 최근에 영어학원을 옮겼는데 감사하게도 탑반에 들어갔다. 소수만 받는 반이라 조금만 못해도 민폐다.
이번 기말고사도 4명의 탑반 아이들 중에 단 한 명만 97점이고 나머지는 100점이었다.
그 97점 아이가 바로 우리 아들이다. 그 친구들은 오래전부터 그 반에 들어와서 익숙하게 잘한다고 했다.
그래도 잘했다. 왜냐면 중간고사에서는 영어를 88점 받았다. 기말시즌에 바로 그 학원 그 반으로 가서 97점까지 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들이 휴가여도 영어는 반드시 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려면 숙제가 문제다. 엄청 많단다.
”그럼 지금 숙제를 끝내야 내일 오전에 대전으로 출발할 수 있어. “
아들은 아무 말이 없다. 또 시작이다. 무언의 전쟁. 중2와의 전쟁!
“얘는 또 말이 없네. 안 하겠다는 거야?”
“할 거야”
“그럼 해”
갑자기 본인 방 불을 끈다. 안 하겠다는 대답의 전원 꺼짐.
한다며. 네가 한다며. 난 속으로 외치지만 더 이상 싸우기 싫다.
난 내 방으로 돌아와 어깨가 들썩들썩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난 쌈닭이다! 너랑 싸워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참는 거다!
매번 숙제와 싸운다. 알아서 하는 건 수학과 과학이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한다. 한 번도 수학 과학 숙제를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여태 영어학원을 5번 옮겼다. 사실 셀 수 없다. 모두 숙제 제대로 안 해서 잘렸다. 그럴 때마다 고생은 엄마의 몫. 학원 알아보고 레벨테스트 따라다니고.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숙제를 안 하게 내버려 두고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내일 당장 아침 9시에 휴가를 출발하기로 해놓고 아이는 이 밤에 불을 꺼버렸다.
결심을 해야 한다. 단호하게!
휴가 첫날. 아침. 난 누구 들으라고 크게 말한다.
“큰 딸 빨리 일어나 나가자. 오빠 빨리 준비해! “
나이가 불혹을 넘은 지 한참 됐어도 남편은 오빠다.
자식 셋이 모두 화나게 하면 난 남편에게 위로받는다. 항상 스마일. 항상 오케이. 나에겐 꿀 떨어지는 오빠.
내 말에 남편과 큰 딸이 부리나케 준비한다.
우리는 아직도 쿨쿨 자는 아들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뒤가 묵직하니 씁쓸하다.
시원하지 않다.
불안하다.
데려가고 싶은데…
체험학습 쓰고도 집에서 혼자 자는 아들. 내 기분은 지금 복잡하고 화가 난다.
결국 우리는 대전을 가지 못했다.
집에서 가까운 강화로 가서 자주 가던 카페로 갔다.
큰딸이 아쉬울까 봐 베이커리카페로 갔다.
“우리 예쁜 큰 딸, 빵 맘껏 골라.”
“우왕 신난다.”
“오빠, 우리 딸이 고르는 거 다 사주자”
“그럼, 그럼~”
우리 스무 살 훌쩍 넘은 큰 딸은 옛날부터 동생들이 없을 땐 아기처럼 애교를 부린다는 걸 안다. 실컷 누려라..
우리는 아침부터 먹으면 못생겨진다는 탄수화물 가득한 빵과 함께 커피를 여유롭게 즐겼다.
시꺼먼 커피는 집에 두고 온 아들로 속이 시꺼메진 내 마음과 같다.
그 커피를 달달한 빵과 함께 마시고도 내 속은 달콤하지 않다.
집으로 돌아오니 숙제를 하고 있다. 그 엄청 많다는 영어숙제.
아들 빼고 휴가 첫날을 보내버리니 기분이 영 안 좋다.
아들은 그렇게 학원숙제를 무사히 마치고 학원으로 갔다.
학원으로 간 지금이야말로 내가 제일 해방되는 이 시간. 만세삼창이다.
그날 밤 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어 아들에게 말을 걸어봤다.
“아들, 우리 내일 광명동굴 갈래?”
“거긴 뭔데요?”
“동굴이지. 되게 시원하고 볼거리가 많대”
“음.. 그래요 좋아요.”
오늘 두고 갔더니 좀 수긍하는 게 보인다. 저런 자세라면 내일 잘 다녀올 것 같다.
휴가 둘째 날.
아침을 상쾌하게 맞이하며 광명동굴로 출발했다.
큰 딸은 가는 내내 입장료와 주차비를 검색하기 바빴고 아들은 수학숙제를 잔뜩 넣어 온 가방을 끌어안고 폰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수학학원에 가야 한다. 당연히 숙제가 많다. 지겨워. 며칠 전 야구 간다고 수학학원에 빠져서 오늘은 꼭 가야 한단다.
이게 무슨 휴가야.
우리는 40분 만에 광명동굴입구에 도착했다.
새로 뽑은 자동차가 하이브리드라서 저공해자동차로 주차비 50프로 할인받았다.
올해 2024년 6월부터 자녀(2명)가 모두 만 19세 미만이라면 다자녀로 적용되어 입장료 만원이 무료가 된다.
우리는 4만 원을 낼 뻔한 걸 무료로 입장가능해졌다.
휴…
주차를 하고 동굴입장료를 발급하려고 보니 우선 산으로 올라가야 하나 보다.
산 입구에 사람들이 모두 줄을 서서 올라간다.
우리 가족은 사람 많은 곳이 누가 정해주지 않은 안내표지인 듯 몸을 그쪽으로 이끌어 걸어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저기 뭐예요? 왜 저리 가요?”
“저기가 동굴을 가야 하는 입구니깐. “
“산이잖아요.”
우리 아들은 벌레를 싫어한다. 특히 벌!!! 난리를 친다. 중2인데 어릴 적부터 그랬다. 벌에 쏘인 트라우마 따위 절대 없다.
어릴 적부터 책을 엄청 보더니 뭘 봤는지 그 뒤로 벌만 보이면 소리를 지르고 엄마가 옆에 있어도 100미터 8초에 달리기를 한다.
“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잖아.”
“싫단 말이야. 진짜 싫어”
“아니 400미터만 걸어가면 된대”
“진짜 벌이 나올 것 같단 말이야 “
지금 아들 눈빛을 보아하니 우리 가족은 오늘 광명동굴 구경은 다 끝났다. 못 들어간다. 고집 가득한.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눈빛. 엄마인 나만 안다.
그렇다고 이 더위에 아이만 차 안에 두고 우리 세명만 동굴로 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포기? 정말 난감하고 화가 나고 어찌해야 할까.
결국은 포기다.
“다 차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말 한마디에 모두 포기와 좌절한 몸짓을 하고는 돌아선다. 단 한 명만 다행이다라는 걸음으로 따라올 뿐.
우리는 그렇게 휴가 두 번째 날을 날려먹었다.
집으로 오고 나니 이 망한 휴가 둘째 날의 체감이 확 밀려온다.
내가 에어컨을 켜고 감자를 까기 시작했던 건 이대로 있다간 짜증이 우리 집을 회색빛으로 뒤엎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은 나만의 조치였다.
감자는 강판에 갈았더니 금세 통이 가득해졌다.
지금 이 순간 내 맘대로 되는 건 감자밖에 없는 듯. 이 친절한 감자가 참 고마울 뿐이다.
감자에 고마워해할 때쯤 남편은 알아서 막걸리를 사러 나갔다.
눈치 빠른 남편 역시 나의 편.
감자채는 우선 물로 씻어 전분기를 시원하게 날려버려 준다. 지금 뜨거워져 들끓는 내 기분까지 날려버려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물기를 뺀 후 소금으로 간을 하고 감자전분을 넣어준다.
감자 큰 거 3개
소금 2 티스푼
감자전분 종이컵으로 2/3컵
그리고 프라이팬에 넉넉히 기름을 두르고 감자채를 얇고 넓게 펼쳐 지글지글 익힌다.
뒤집기 전에 한참을 두고 노릇노릇 누룽지가 되도록 기다려준다.
살짝 뒤집어 봤을 때 노릇하면 그때 뒤집는다.
뒤집고 나서도 반대편이 또 누룽지처럼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완성시킨다.
그래야 바삭하고 쫀득함이 가득해서 식감이 좋다.
감자채 전이 다 익을 때쯤 딱 맞춰 남편이 알밤술을 사 왔다.
“어찌 내가 오늘 알밤술 마시고 싶은 걸 알았어?”
“기분 꿀꿀할 땐 달달한 거지”
바밤바 맛이 나는 이 막걸리는 술을 잘 못 마시는 나에게 딱이다.
우리 남편은 나에게 막걸리를 하나도 흔들지 않고 윗부분 탄산 가득한 막걸리를 따라줬다.
“아주 맛있는 부분만 따랐어. 우리 와우 맛있게 마셔봐.”
눈웃음으로 무장한 남편이 아주 소중한 것을 전해주듯 나에게 막걸리 한잔을 살포시 놓아준다.
막걸리가 아니라 파인애플탄산음료색을 띠는 밤맛 막걸리는 감자채 전에 딱 어울렸다.
비록 술을 너무너무 못 마셔서 120미리 컵에 따라준 것도 절반밖에 못 마시지만 난 그랬다.
남편이 예쁘게 갈기갈기 찢어 놓은 감자채 전을 청양고추장아찌 국물에 찍어 먹었다.
남편은 일 년 전 내가 만들어 놓은 청양고추장아찌도 작은 종지에 잘게 잘라놨는데 맵다 매워 라며 잘 먹었다.
매콤한 소스에 찍어먹는 감자채 전 맛은 그야말로 나를 위로했다.
광명동굴 구경도 못해 본 것과 휴가이틀을 통째로 날려먹은 중2아들은 나의 속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기름진 감자채 전은 매콤한 청양고추소스에 담가져 나의 화를 달래줬다.
큰딸 역시 어릴 적 빨간 딸기만 봐도 매워 매워를 외치던 맵찌리였는데 이젠 저 맵디매운 청양고추 조각을 하나하나 감자채 전에 올려 먹으면서 맛있다를 외친다.
청양고추 장아찌 만드는 법
청양고추는 씻어 물기를 빼고, 고추는 송송 썰어 유리그릇에 담아 준비한다. 간장 1 설탕 1 식초 1 물 1 이 네 가지를 넣고 끓인다. 고추가 담아 있는 유리그릇에 끓이던 간장물을 식히지 않고 바로 부어준다.(바로 부어주는 게 중요) 실온에 하루 두었다가 냉장고에 보관하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부침개나 삼계탕 먹을 때 곁들여 먹으면 간도 되고 매콤함도 더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휴가 이틀을 감자채 전으로 위로받으며 마무리했다.
아직 휴가는 끝나지 않았다.
체험학습이 아직 남은 아들은 숙제를 미루고 혼자 휴가를 망칠 것인지, 우리 가족 휴가와 함께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중2아들 쉽지 않아 남편과 깊이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내버려 두어라. 어찌 내버려 두냐로 갈려서 심각해졌지만 정답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건 확실하다. 중2 아들 키우기 참 맵다. 잘 담가진 청양고추장아찌보다 100배 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