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곰국 해 왔다. 한 그릇 말아먹고 가라. ”
아침 7시 반 출근 준비로 한창인 내 뒤통수에 대고 엄마는 커다랗게 얼린 곰탕 세 덩이를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 넣으며 말씀하셨다. 대충 화장을 마치고 식탁에 앉으니 뽀얀 국물에 파란 쪽파가 동동 떠 있는 곰탕이 모락모락 먹음직한 자태를 드러내며 소담하게 놓여 있다. 소금 조금 솔솔 뿌리고 밥을 말아먹기만 하면 된다. 그 뜨끈하고 담백한 곰탕 국물이 밥과 함께 잘도 넘어간다.
‘ 아~ 잘 먹었다. ’
코에 송송난 땀을 닦으며 말끔히 비운 빈 곰탕 대접을 내려놓고 스마트폰으로 오늘의 뉴스를 훑어본다. 이태원 발 코로나로 다시 난리가 난 요즘 엄마가 끓여준 곰탕을 먹다가 2009년 어느 날 병원에서 먹었던 엄마의 곰탕이 다시 생각난다.
‘유행에 민감한 나. 이런 유행까지 다 따라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걸려버렸다. 신종플루!’
학교에서 몸이 으슬으슬하고 목이 따끔거리는 게 뭔가 또 아플 징조가 찾아왔구나 싶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헛구역질이 나서 눈물이 조금 나올 뻔했다. 감기인지 유행한다는 신종플루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심하게 아프겠다는 더러운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다음 날 증세는 더욱 심해져 열, 두통, 메슥거림, 숨 가쁨, 기침, 가래, 인후통, 근육통의 증상이 한꺼번에 몰려와 결국 응급실 행. 그 날 나는 신종플루 확진자가 되어 타미 플루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타미 플루 먹고 며칠 쉬면 낫겠지 했는데 5 일이 지나도 목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다. 여유분의 약을 타러 간 거였는데 병원에서 다시 찍은 엑스레이를 보시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 어이쿠, 심각한데. 폐렴이에요. 입원 치료합시다.”
그렇게 입원했다. 처음엔 연구학교 보고회 때문에 준비해왔던 수업들, 나를 기다리는 많은 학교 업무와 학생들이 떠올라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속상해서 눈물이 나더니 나중에는 조금 겁이 나서 눈물이 났다. 하필 입원한 때쯤 티비에서는 유명 연예인의 7살 난 아들이 나와 같은 신종플루와 폐렴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뉴스를 본 이후 티비를 보지 않았다. 최소 일주일 이상 입원이라는 말에 더 이상 의사 선생님께 퇴원을 종용하지 않았고 학교로 서둘러 돌아가 연구학교 보고회를 치르겠다는 생각도 접어두었다.
항생제를 찌를 때마다 아프고 메스꺼운 느낌, 가슴을 큰 돌로 지어 누르는 느낌은 병원 생활 내내 나를 죽음에 대해 살포시 생각하게 만들다가 어릴 적부터 천식으로 고생했지만 지금까지 나를 지켜 오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번에도 나아갈 거라는 셀프 위로를 하다가 나는 그렇게 공포와 희망의 시소를 번갈아 타며 병원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밥이 징그러울 정도로 맛이 없어 엄마한테 전화했다.
“ 엄마, 나 교촌 치킨 한 번만 시켜주면 안 돼?, 응? 제발~”
나는 그냥 떠오르는 맛있는 음식이라 한 말인데 엄마는 갑자기 “너 식습관 안 바꿀래?”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하신다. 인스턴트식품이나 방부제 들어간 음식, 편식, 짜게 먹는 습관 모든 게 니 면역력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아느냐 모르냐 식의 잔소리를....
난 그래서 잠시 전화기를 내 귀에서 멀게 하고
“ 엄마.. 알겠어. 그런데 그래도 교촌 치킨 한 번만 먹으면 안 될까? 너무너무 먹고 싶은데..."라고 말을 꺼내는 찰나, 갑자기 전화기 사이로 들리는 엄마의 울먹이는 목소리...
“ 내가 니 입원시키고 집에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아나? 지금 심각한 상황인데 니 계속 니 몸 생각 안 하고 이랄래?”
“....”
그렇게 엄마는 한참을 흐느끼셨다.
몰랐다. 엄마가 나 때문에 이렇게 마음 상해하셨을 줄을. 이렇게나 조마조마해하시고 걱정하셨는 줄을. 자주 아파왔으니 으레 또 유행 따라 아프나 보다 했는데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무서우셨나 보다.
그 날 저녁 엄마가 병원에 다녀가셨다. 전염력 있는 병이라 오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미리 말해두었지만 엄마만이 유일한 내 병실 방문객이 되었다. 엄마가 손수 며칠간 고우셨다는 곰탕과 닭 가슴살 샐러드, 과일을 한껏 들고 오신 엄마는 스테인리스 통에 담긴 뜨거운 곰탕을 대접에 부어 밥 한 덩이를 말고는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한 술 뜬 다음, 또 후후 불어 내 입에 한 입, 한 입 밀어 넣었다.
통 먹히지 않던 밥이었는데 씹히지 않고 훌훌 넘어가는 곰탕의 목 넘김에 나는 그 날 엄마가 내민 숟가락을 덥석 덥석 잘도 받아먹었다. 비었던 속이 뜨끈한 것으로 채워지니 속부터 든든함이 새어 나와 그제야 생기라는 것이 도는 듯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이만큼이나 먹었으니 곧 나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는 내 이마와 코에 송송 난 땀을 닦아 주시고 내 떡 진 머리도 감겨 주셨다. 배부르고 찝찝함이 사라지니 딱 그 날부터 살 것 같았다. 그 날부터 매일 한 끼는 엄마의 곰탕에 밥을 말아먹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 말대로 2주 후 건강하게 퇴원했다.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의 엄마가 된 지금도 나는 아직 곰탕을 끓여본 적이 없다. 하루 종일 고기의 핏물을 제거하고 큰 들통에서 여섯 일곱 시간씩 몇 번이고 불과 물을 조절해가며 새로 끓여내는 그 인내를, 동동 뜨는 기름과 불순물을 일일이 제거하여 내는 끈기를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선물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곰탕 그릇을 싹 비운 나를 보고 엄마는 말씀하신다. “내가 이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닌데 자식 먹이는 거는 참 즐겁단 말이야. 남 줄라고 하라고 했으면 절대 못할낀데.. ” 그러면서 나를 위해 평생에 몇 번이고 끓여내셨을 그 곰탕을 마치 어제 처음 끓인 사람처럼 몇 번이나 새로 끓여 냈는지, 몇 시간이나 고았는지, 잡내를 없애기 위해 기름을 얼마나 많이 걷어내셨는지를 말씀하신다. 내가 아팠던 날에도 또 손주들을 돌보아 주는 오늘날까지도 엄마는 엄마의 곰탕으로 나를 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