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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시환 Aug 19. 2021

거짓말이야

-이청준 作 ‘벌레이야기’와 이창동 감독의 ‘밀양’ (2007)

*학부 <문학과 영상>이라는 수업으로 원작과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비교 분석한 비평 과제입니다.

*제목 <거짓말이야>는 영화 ‘밀양’의 삽입곡인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에서 인용했습니다.


 

책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영화 포스터 출처 : 네이버 포토


1. 작품의 첫 시작: 알암이와 준이의 죽음 암시

‘벌레이야기’는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나갔다.”(p.38)으로 시작한다. 가출과 유괴 모두 언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가출은 선택지가 있지만, 대게 유괴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알암이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보여준다. 밀양의 첫 장면은 밀양으로 가는 신애의 차가 고장이 났고, 신애와 아들 준이는 카센터 직원을 기다린다. 준이가 차에서 나오질 않아 신애에게 억지로 끌려나오다시피 하는데, 준이는 도로에 힘없이 축 쳐져 누워있다. 신애는 그런 아들을 일어나게 하려다 결국 아들에게 화를 내고 만다. 여기서 준이의 모습을 보아 준이의 죽음을 암시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가 그렇듯 신애는 준이를 되찾고 싶어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중반 신애가 일부러 코를 고는 행위는 신애가 준이를 그리워하는 행동이다.       


2. 불편한 사람(): 이불 집 김 집사와 은혜약국의 김 집사와 종찬, 밀양 마을 사람들

알암이는 결국 죽은 채로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김 집사는 한동안 아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가 아내를 다시 찾아왔다. (“김 집사님은 이제 작자의 죄에 대한 사람의 심판은 끝났다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하느님의 심판뿐이라 하였다. 이 마당에 아내가 할 일은 그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일이라고 하였다.”(p.61)) 또한 아내가 교도소에서 김 도섭을 만나고 온 후에도 주님의 큰 뜻을 강조 (김 집사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원망스럽도록 하느님의 역사만을 고집했다.(p.75)) 하고 알 수 없는 아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 집사는 아내에게 믿음을 강요를 한 것이지 배려를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 마냥 아내에게 말한다.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남편이 평소에 살고 싶었다던 밀양에 내려와 새 출발을 다짐한다. 밀양은 조그만 동네이고, 서울에서 내려온 신애는 동네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시선을 한 번에 받는다. 신애가 한 말과 행동은 동네로 퍼진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것 같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종찬’이 신애 곁을 계속 맴돈다. (지킨다.) 신애가 그들 중에서도 종찬이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가도 정작 신애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종찬이를 찾지 않는다. 또한 은혜약국의 김 집사는 신애씨 같이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의 큰 사랑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며 타인의 불행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하느님의 큰 사랑과 믿음을 강권한다.       


3. 거짓된 믿음: 아내와 김 집사와 김 도섭 / 신애, 김 집사와 신도들, 박 도섭

사실 소설과 영화 속 인물들은 신앙심이 모두 진실하지 못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무비판적’으로 혹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아내와 신애는 신앙에 의지해 스스로 마음을 치유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나간 아들을 잊지 못했고, 하느님의 큰 사랑과 뜻을 이해하려는 목적이 아닌 지푸라기 심정으로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살인범 도섭을 만난 후 급격하게 절망감과 배신감을 느낀다. 두 명의 김 집사와 영화 속 신도들은 돌변한 신애를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 속 목사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아내와 신애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땐 함께하지만, 그들이 하느님과 냉담 중이고 그들에게 사고가 터질 때는 김 집사(와 신도들)은 그녀(들)를 걱정하면서도 찾아가지 않는다. 오로지 남편과 종찬만 신애의 곁에 있다. 마지막으로 김 도섭과 박 도섭 모두 살인을 저질렀지만 회개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한다. 그것도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그런 그의 모습에 아내와 신애 모두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 하느냔 말이에요. (중략) 주님께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p.75) 라고 말한다. 도섭은 신보다 먼저 아내와 신애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 다음에야 종교를 믿어야 하지 않았을까. 도섭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과 잘못을 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 그저 하느님을 믿은 것뿐이다. 과연 진실한 믿음은 존재하는 것일까?      


4. 용서: 자살과 신애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자르는 행동

두 작품의 결말이 상이하다. ‘벌레이야기’ 속 아내는 자살을 선택했고, ‘밀양’은 도섭의 딸을 미용실에서 만난 후 집에서 자신이 직접 머리를 자르며 끝난다. 김 도섭이 형장에서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임해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중략)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주십시고....”(p.80-81)라고 말한다. 아내는 끝끝내 김 도섭을 용서할 수 없었고 하느님에 대한 배신감과 마음 속 깊은 절망감을 견뎌내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을 죽여 놓고 뻔뻔스럽게 자신도 해내지 못한 것을 김 도섭은 자신의 아들의 영혼과 자신을 위로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반면에 신애는 대적할 수 없는 신과의 대결에서 자해를 하고 만다. 신애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하고 미용실을 가는데, 그곳에 도섭의 딸이 일하고 있었다. 신애는 당황스러워하다 얼굴을 찌푸리고 결국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거울을 올려두고 도섭의 딸이 자르다가만 머리를 직접 자르기 시작한다. 머리를 스스로 자른다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이전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애는 그전까지는 자신 외의 것에 휘둘렸다. 도섭의 딸을 재회함으로써 신애는 깨달았다. 신도, 타인도 아니라 자신이 용서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고, 그래야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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