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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우뚝 May 08. 2020

너무 섣부른 판단

속도감 있는 세상 속에서 느리게 대화하기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늘리다 보니 감당할 수 없는 권태로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운동도 하고, 요리도 하고, 영화도 보며 시간을 보내지만, 실내에서 연 놀이를 하듯이 무엇을 해도 충분치 않고, 갑갑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푸른 하늘 아래 넓은 벌판을 내달리고 싶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집과 바깥세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라도 지어진 듯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글 속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경계도 사라지고, 운신이 자유로울 테니.


그런데 무엇에 대해서 써야 한담. 친구에게 글감 하나 던져 달라고 하니, ‘고치고 싶은 습관’에 대해서 써보라고 한다. 쉬워 보였는데, 막상 쓰려니 막막하다. 스스로 결점이 많은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고쳐서 없애고 싶은 결점이라니, 거북이 등에 붙은 따개비, 돌멩이 위에 내려앉은 이끼처럼 쉽게 내어주기에 서운한 것들이다. 결점들 덕분에 비로소 완전한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라 생각하다 문득 스스로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웃음이 난다. 결점이 있는 나의 모습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꼭 고치고 싶은 습관이 하나 스쳐 지나간다. 너무 섣부른 판단.


    통신의 발전으로 가족, 친구, 동료들과 거리의 제약 없이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과의 편리한 소통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현상에, 사물에,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 쉽고 빠르게 판단을 내린단 생각이 든다. 손바닥만 한 평면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통의 급류 속에 행간이 자리 잡기란 쉽지 않다. 정보의 교류와 소통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서로를 알아갈 기회와 기다려줄 끈기가 뿌리내릴 수 없다. 그래서 전해 듣는 소식들에 나는 또 그만 머뭇거릴 틈도 없이 판단해버리고 만다.


“그 친구가 너한테 그렇게 말했어? 걔는 애가 왜 그렇게 배려가 없니.”

“본부는 일 처리를 왜 그렇게 한 대? 진짜 이해가 안 가.”

“여긴 개도국이잖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분명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대화의 속도에 맞춰 판단을 내린 것인데, 마음이 편치 않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 친구도 사정이 있었겠지,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하며 들릴락 말락 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애써 무시하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쌓여있는 대화 상자 속에서 악취가 풍겨오는 것만 같다. 나의 섣부른 판단은 원재료를 제대로 다듬지 않고 욱여넣어 상해버린 음식 같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들어보고, 또 기다려주면서 이해로 숙성된 잘 익은 발효 음식 같은 대화를 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특히 내가 쉽게 단정 지어버린 누군가가 처했던 피치 못할 사정을 나중에라도 알게 될 참이면, 꾹꾹 눌러 놓았던 미안함이 터져버린다.


이런 개인적 찝찝함 외에도, 충분한 숙고와 이해의 노력이 결여된 판단은 사회적으로도 비효율적이다. 우리는 이를 선입견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암막과도 같이 시야를 차단해서 협력과 발전의 가능성을 저해한다. 뛰어난 장거리 달리기 선수를 겉모습만 보고 단거리를 뛰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단거리에서도, 장거리 달리기에서도 원하는 기록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수의 입장도 들어보고, 직접 달리는 것도 본 뒤 판단해도 늦지 않을 텐데, 우리는 늘 그저 눈앞의 정보들만 보고 판단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동티모르까지 그 손아귀를 뻗쳐왔을 때, 국제사회는 저마다의 판단을 바탕으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한 지원에 나섰다. 공중위생 증진을 통해 어느 정도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만큼, 동티모르에 상주해있던 각국 정부 기관과 비정부기구 등은 손을 씻을 수 있는 간이 세면대를 도시 곳곳에 설치했다. 먼지 쌓인 건축자재로 급하게 만든 세면대는 우려와 달리 그 역할에 충실했고, 시민들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후 주요 공공장소에 출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국적으로 위생 시설은 부족했고, 소외된 지역에서 어떻게 공중위생을 담보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던 시장과, 방문한 보건소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한 위생 시설을 보게 되었는데, 매우 간편해 보이는 동시에 훌륭하게 기능하는 것에 무척 놀랐다. 집마다 가지고 있는 제리캔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은 후 철봉처럼 생긴 받침대에 비스듬히 걸어놓고, 지렛대에 연결해 페달처럼 지렛대를 밟을 때마다 물이 나오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든 세면대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만 만들어졌고, 물을 자주 채워야 하는 수고만 있을 뿐, 손으로 수도꼭지를 열 필요도 없어, 위생적으로 더 뛰어났다. 동티모르는 최빈국이니까,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섣불리 판단했던 나는 조잡하지만 당당한 그 세면대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 나라는 자원과 기술이 부족하니 ‘위생시설을 직접 만들어 공급해야 한다’는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동티모르 사람들이 목소리를 들었더라면, 커뮤니티와 협력했더라면, 위생시설을 더 많은 지역에 더 빠르게 공급할 수 있지 않았을까.

KOICA, Mercy Corps 등 국제사회가 공조해 설치한 손 씻기를 위한 위생시설
(좌) 동티모르 시장에 주민들이 설치한 간이 세면대 (우) 보건소에 설치된 간이 세면대와 출입 전 손을 씻는 동티모르 보건부 직원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는 ‘가난한 자를 위한 선택’이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결핍에 기반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It is not a preferential option for your poor, it is a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그가 아이티에서 활동할 무렵, 세계보건기구,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비용효과성을 고려해 백신과 식량 공급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정작 아이티인들이 원한 것은 병원과 학교였다고 한다. 단기적인 백신과 식량 공급보다 우리가 누리는 것과 같은 안정된 보건 서비스와 자녀를 위한 양질의 교육 환경이 아이티인들에게는 더 중요하고 시급했던 것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처럼, 개발협력에 있어서 특히 현장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한정된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섣부른 판단은 방음벽과도 같이 현장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그래서 개발협력 현장에서는 잠시 판단을 보류하고, 주의 깊게 관찰하거나 소통하며 기다려주는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 부자와 라자로의 일화에서, 부자는 특별히 악행을 저지른 바 없지만, 부자의 집 대문 앞에서 죽어가던 라자로를 몰랐단 이유로 지옥에 간다. 바깥 세계에 대한 단절과 무관심, 이해하려는 노력의 부재가 부자의 죄목이었듯, 자신의 상식에만 기반한 성급한 판단의 오류 역시 고의적인 태만이자 부주의가 아닐까.

     

    어떤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노력하는 것과 달리, 나쁜 습관을 고치는 일은 하루하루가 실전이다. 약속에 늦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약속에 늦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없다. 그저 약속이 생길 때마다 늦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언젠가 습관의 뿌리가 뽑힐 것이다. 쉽게 판단해버리는 나의 나쁜 습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 또는 어떤 것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이를 경계하고, 성급한 판단의 유혹을 저지해야 한다. 습관이 완전히 고쳐지기 전까지는 성급할지언정 긍정적이고 좋은 판단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쳐야 할 습관이란 것도 내가 극복해야 할 세계이자, 파괴해야 할 알이 아닐까. 다행히도 내가 고치고 싶은 습관, 쉽게 판단해버리는 버릇은 ‘투쟁’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판단을 유보하고, 속도감 있는 세상 속 느린 대화를 유지하는 것이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께 간다면, 우리는 아마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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