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너별 Jun 11. 2023

뮤지컬 <빨래> 관람 후기 : 3시간동안의 마약 체험

뮤지컬처럼 살면 안되나?

  대학로에서 뮤지컬 <빨래> 를 보고 왔다. 연기(acting) 클래스를 들으며 보러가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지체 없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예~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너 이 연극 진짜 좋아할 것 같아" 라며 추천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이라 잘 기억은 안난다. 근데 이렇게 연기에 관심있는 분들이 다같이 보러가면 이만한 좋은 기회가 있을까? 있어서가 그 생각의 결론이다. 

 

혜화역에 도착해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서 극장 쪽으로 가는 길. 커플과 대학생과 웃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나는 활기를 만땅 충전한다. 혼자 웃으며, 걸음을 늦추며, 찬찬히 주위를 둘러본다. 좋다. 



 사실 처음엔 연극인지 뮤지컬인지도 헷갈렸다. 알고보니 뮤지컬이네? 하고 더 좋았다. 

극장에 들어가 보니 확실히 예전에 보던 뮤지컬에 비해서는 좌석 규모도 작은 소극장이었다. 소통하는 느낌, 배우가 살아숨쉬는 느낌을 선호하는 나라서 더 좋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배우가 처음에 주의사항을 청산유수로 설명해 주고 개그도 놓치지 않는다. 100% 짜여진 개그임에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터진다. 

 

이전에도 그랬듯 나는 열거형으로 후기를 작성한다. 그래도 시간순으로 나열하려고 노력은 하겠다.


[소품 디테일]

빨래를 털때 나오는 먼지 가루들. 서점에 놓인 재치 있는 제목의 책들, 잘린 여직원이 술을 먹는 제주 똥돼지집. 신경을 썼다는 걸 느낄수 있던 부분이었다.


[연출 디테일]

- 펄럭이는 빨래에 바람이 일며 흩날리는 나영의 머리칼과 무언가에 씻겨지는 듯한 싱그런 표정. 이 뮤지컬의 수많은 장면중 하나를 사진으로 꼽으라면 그 장면을 꼽고 싶다.


- 너무 소름돋을 정도로 잘짜여진 웃음 포인트들. 특별히 기억나는 멘트는 비누 있어요? 하는 나영의 물음에 "비누 있지. 행사중이여. 1+1-1"라고 답하는 슈퍼 아저씨.  참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을까 싶었다. ㅎㅎ 

- 관광버스 아줌마가 핸들을 틀때 모두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하는 그 부분에서, 내가 저 아줌마 역할을 해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내가 모든분들을 컨트롤한다는 그 쾌감이 들 것 같았다. 

- 일인 다역이 너무 대단해보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일인다역을 안하는 여주인공 나영의 역할이 뭔가 특별해 보였다. 


[캐릭터!]

1. 마이클

-  참 예뻐요 노래가 끝나고 우~ 베이베 하면서 기교를 부리는 마이클. 쌀집 앞에서 쌀~~~~!! 하며 마무리하는 마이클. 

- 술먹고 늦게오지말라는 솔롱고의 말에 '지키지못할 약속은 하지 않겠어!' 하며 집을 나서는 마이클.

- (진짜 나만 느꼈을지도 모르는) 영어권 껄렁이들이 쓰는 특유의 말투가 있는데 (프슝~ 오! 하는 감탄사 같은 건데 글로 표현이 안된다) 그거 보고 찐으로 감탄했다.



2. 구씨

- 희정엄마와 연애중인 구씨. 데이트 가자고 할때 대놓고 느끼한 꼴값(?) 이란건 다 부리고 우산을 펴고 씌워줄 때 '진짜 한번쯤은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말에 똑같은 느끼멘트로 응수하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뭐야~ 하고 피식웃으며 퍽 맘에 들어하는 그런 사람에게.

- 집앞에서 대놓고 부부(?)싸움을 하다가 바지가 벗겨진 채로 엎드려서 흐느끼는 구씨(실제로 매우 코믹한 장면). 할머니가 옷 입어! 소리지르며 옷을 입혀주고, 엉덩이 들어~ 말하니까 구씨가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 알아서 들어주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 너무 웃겨서 좋았다.


3. 희정엄마

- '우리 좋았잖아' 하며 갑자기 할머니와 연인 상황극. 방세 깎아달라며 할머니께 부리는 애교인데, 너무 좋다 ㅎㅎ

- 속궁합은 좋지? 하고 할머니가 물으니 물을 뿌리며 '하지마!! >0<' 하고 부끄러워 하는 연기. 진짜 너무 좋다 ㅎㅎ

- 울먹거리는 나영이의 '고맙습니다' 라는 멘트로 시작되는 노래 <슬플 떈 빨래를 해>.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하며 추는 진짜 캐릭터 그 자체가 승화된 춤이 있는데 그것도 너무 좋다 ㅎㅎ



4. 할머니

- 그냥 깨알같은 할머니스러운 말투와 몸짓이 최고. 

- 동사무소 직원이 돌아간 후, '누가 누구보고 반토막이래~우리딸. 한귀로 흘려' 하면서 우는 딸래미를 달래는 그 멘트가 너무 아렸다. 


5. 알랑방구 끼는 서점직원들

- 그간 보아왔던 아부의 정석. 그냥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막말로 꼴보기 싫은 행동도 제대로 하면 웃게 된다. 킹받는 포인트도 제대로 해보자. 그럼 사람들이 인정해줄지도? 

- 별개로 짧게 있었던 고성방가 씬도 너무 재밌었다. ㅋㅋㅋ 누가누가 술취한 연기 더 잘하나 배틀하는 느낌.


6. 빵

- 서점 사장님이 여직원을 자르면서 성을 내는 연기 속에서, 볼펜을 집어던지는 그 순간이 제일 리얼했던 것 같다.  


7. 나영

- 주인공들은 재치 있거나 빌런스러운 캐릭터는 아니라서 특별히 톡톡튀는 포인트는 없었지만,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드니' 하는 가사를 반복할 때 많은 힘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8. 솔롱고

- 나영과의 대화 속에서 잘 알아듣지 못할 때 영혼없이 "네~" 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외국어 못알아듣을 때 내가 'y,yes~' 했던 순간이 떠올라서 너무 웃겼다. ㅎㅎ


[노래]

- '참 예뻐요'에서 '짧게 웃고, 길게우는 사랑 준 사람' 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됐다. 

- '안녕' 은 짧으면서도 노래가 너무 좋아서 기타로 연습했다.


[아쉬움(이랄것도 없지만..) 포인트]

1. 갑분 결혼

  갑자기 솔롱고와 나영이 결혼을 할줄은 몰랐다. 공연은 공연으로 봐야되는데 현실적인 생각이 불쑥 솟았다. ㅎㅎ

2. 책속에 길이 있네

 "빵" 이 부르는 뽕삘 충만한 노래이자, 2막을 여는 노래다. 뒤에 안무하는 저세상 텐션의 '맑은 눈의 광인'. 각기춤을 추며 흥을 돋우는 그 에너지에 그만 넋놓고 바라보았지만, 노래 자체는 뭔가 길게 듣기보다는 짧게 듣고싶은 노래였다. ㅋㅋㅋㅋ



[눈물 포인트]

 눈물샘이 말라 잘 나오지 않았는데 결국은 툭 툭 건드리니 터지듯 흐르기보다는 잔잔하고 꾸준한 울컥 포인트가 있었다. 우선 나는 그냥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서로 낭만적인 대화를 나눌 때, 그 장면에 몰입하는 것만으로도 울컥하는 편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고 그 정도로 그칠 때도 많아서 그렇게 마무리될수도 있겠다 싶었다. 할머니가 빨래를 하며, 딸을 업어들고 병원까지 데려다 준 희정엄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장난섞인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 확 바뀌어서 '고맙네..' 하는 한마디에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잔잔하게 수도꼭지를 아주 조금만 튼듯 다시 웃긴 장면이 이어질 때 까지 눈물이 쭉 이어진 것 같다. 이유는 몰라. 나이가 들수록 내 눈물의 이유를 난 모르겠다 도무지.

 + 솔롱고가 마지막에 '사랑해요' 하고 프로포즈하며 꽃을 주는 그 진부하고도 진부한 그장면이 나의 가슴을 울렸다. 그냥 개연성을 떠나 그 씬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다. 




[총평]

너무 많은 감정을 3시간 안에 느껴버렸다.

놀라움, 기쁨, 슬픔, 감동의 종합 선물세트로부터 거의 가둬놓고 얻어맏는 느낌. 

난 또 한번 도파민에 절여졌다. 

마약을 해본적은 없으나, 베타 테스트 버전으로 마약 체험을 한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영화보다 연극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전에 '물랑루즈'라는 뮤지컬을 볼때 느끼지 못했던 기분이 들었다. 바로 '나도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라는 숨어있던 생각이 빼꼼한 것. 두더지잡기 마냥 내가 억누르던지, 아니면 제발로 다시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전에 썼던 글처럼 좋아하는 마음도 새싹과 같이 잘 보호하며 키워줘야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알기에 감안하고 화분을 하나 마련할지 말지를 조금 더 고민해 봐야 겠다. 나중에라도 말이다. 



연극 관람이 끝나고 비가 와서 운치를 즐겼다. <비 오는 날이면> 노래를 떠올리면서.




아 하나 더, 같이 본 분이 '그냥 뮤지컬처럼 살면 안되나?'하는 말을 하던데 뭔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뮤지컬 같은 삶, 정말로 꿈꾼 적이 있었다. 내가 인생이라는 뮤지컬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매콤한 현실에 타협한 지금, 뮤지컬의 맛으로 묵혀둔 꿈을 다시 되살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 스스로 사랑(어떤 관계든 사랑하는 그 정서적 교감 자체)을 잘 안한다는게 느껴지는 요즘,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분과 함께 이 뮤지컬을 다시 보러 오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