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뜨거운물 찬물 Oct 12. 2021

지금 하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어느 초심

20XX. 4. 4 예산담당 마지막 날


그 날로부터 2년 전, 처음 본사발령 받던 날도 같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싫고 힘들고 서러웠던 매장일이었는데, 돌이켜보니까 그렇지 않았다.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정기 조직개편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의 자기 짐을 쌌고, 나는 회사의 기획실에서 이제는 좀 더 눈에 안 띄고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부서로 가게 되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컴퓨터를 끄고, 나와 A누나 빼고는 다들 남아있는 사무실을 먼저 나왔다. 내가 여기 온 후 항상 임원실에서 가장 가까운 그 같은 자리에 앉아 일하던 A누나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모습도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뜻하니 믿고 만개했다가 때도 모르고 내린 비로 죄다 꺾여버린 벚꽃처럼, 회사생활도 꼭 똑같은 것 같다.

 

신촌에서 치던 까대기와, 불나게 팔아제꼈던 초콜렛과, 삼정점 뒷골목의 가난한 이웃 가게들과, 파지 줍던 전라도 할머니와, 본사 옥상의 하얀 담배연기와, 며칠씩 연거푸 택시타고 돌아오던 한강의 야경과, 뭔지도 모르겠는데 이겨내려고 애썼던 그 많은 시간들을 떠올렸다. 내가 했던 일들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얄미울 만큼 생각보다 수월하게 대체되겠지만, 그 일 하면서 겪은 마음만큼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가 없다. 누구한테도 온전히 설명할 수가 없는 나 자신만의 스토리니까 말이다.

 

인수인계서에 써내려간 항목 갯수만큼 또 많은 경험을 했고, 괴로웠던 90%의 일들만큼 또 그걸 안했으면 끝까지 몰랐을 즐거웠던 10%의 일도 해봤다.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누구나 하나씩 만드는 거니까, 누구에게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는 거니까. 문득 조금은 더 겸손해진 것 같았고, 회사를 좀 더 오래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는데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을 더 많이 기억속에 남겨놔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회사를 왜 다녔을까. 돌이켜보니까 나 그 일들, 그렇게 지긋지긋하고 힘들고 서러우면서도 좋아했었다. 싫어하면서도 좋아했었다.

작가의 이전글 Post "북한 해킹", Fast "대한 민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