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사랑스러움
어렸을 때 앨범을 볼 때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진이 하나 있었다.
밝은 갈색빛의 보루네오 원목 서랍장. 그 앞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동생이 앉아 울고 있다. 한올 삐져나올 틈도 없이 야무지게 넘겨 빗어 하나로 꽉 묶은 머리, 잔뜩 찡그린 표정.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엄마에게 물었다.
"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엄마는 내 질문에 그저 웃기만 했다.
동생은 무척 서러웠을 텐데, 슬펐을 텐데, 우는 모습이 찍히는 게 싫었을 텐데 엄마는 왜 동생을 달래주기는커녕 사진으로 떡하니 남겨놓았을까. 심지어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재밌어했다. 딸은 슬픈데 엄마는 도대체 왜?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의 감정이 하찮게 여겨질 뿐이기 때문인 건가?
이제 나이를 먹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엄마가 그 사진을 왜 찍었는지, 왜 엄마가 그 사진만 보면 웃었는지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우는 모습조차 너무 귀여웠던 거다. 이제는 어렸을 때 왜 그게 의문이었는지가 의문일 정도다.
때때로 아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울거나,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거나 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웃지 마!!"
그러면 아이는 마지막 '마'에 온 힘을 싣고 외친다. 이럴 땐 무조건 아이에게 바로 사과하고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놀리는 걸로 오해할 수 있으니.
"아, 너무 귀여워서 그만. 넌 심각한데 진짜 미안해. 놀리는 거 절대 아니야. 미안미안!"
너를 무시하거나 네 감정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런 표정과 감정표현조차 너무 귀여웁고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거라고 좀 더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덧붙인다.
아이의 감정 표현은 진지하고 소중하기에 함부로 웃어대는 것은 분명한 실례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웃지 않고는 배겨내지를 못할 만큼 뽀짝 하게 느껴지는 것임을 아직은 이해하기 어렵겠지.
귀여움은 비단 어린 아이나 작은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책을 읽는데 이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사람이 전자 기계도 아니니 켜면 불 들어오고 끄면 꺼지는 게 아니잖아요. 껐는데도 조금 불씨가 남아 있는 것 같을 수도 있고, 켰는데도 이게 불이 들어온 건지 알쏭달쏭할 때도 있잖아요. 썸 타는 마음이 그렇잖아요. 사랑의 불이 켜질락 말락 하는 기묘한 상태요. 그것도 귀엽지요. 어떻게 보면 애매하거나 후회하는 거 이런 게 또 인간적일 수도 있어요."
<김창완,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중>
그리고 뒤이어 얼마 전 읽었던 다른 책의 구절도 떠올랐다. 평생을 수치심에 억눌려 생기 없고 주눅 들어 보이던 주인공이었다. 그녀에게 어린 손자가 작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나처럼 지나치게 심각하고 진지했던. 저 어린아이의 한 마디는 우리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때로는 아이들이 표현하는 소위 '부정적'인 감정들.
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엄청난 문제로 심각하게 느껴질 때조차도,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귀여워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언가를 분명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애매한 것 같은 상황도, 부끄럽거나 성이 나서 조금은 못나고 다소 과해보이는 모습도
한심하거나 답답하게 바라보는 것 대신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봐 줄 수 있다면.
그렇다고 당장 그 모습을 없애주려는 좋은 의도 혹은 강박에 의한 어떤 시도도 없이, 그저 '귀여워'라며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잠시 기다려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내 마음에 한 뼘 정도의 자리는 마련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를, 타인을 받아들여줄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여유가.
너나 나를 무시해서도 아니고, 그 감정이 하찮아서는 더더욱 아니고 그런 존재의 사랑스러움을 깊이 느끼게 되어서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봐준다면,
순간의 힘든 감정들은 어느새 자연스레 툭툭 털고 다음 이야기를 재잘거리며 나눌 수 있지 않을까.
2024.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