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을 떼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시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날개옷과 함께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는데, 정작 논문 관련된 것들을 꺼내 정리한 건 몇 달이나 흐른 후였다.
집 앞 스터디 카페 정기권 등록을 하고 자리를 잡았다. 정리만 했을 뿐인데 30분이 지났다. 막상 논문 작업을 시작하려니 책도 읽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갈피를 못 잡은 마음도 손도 어수선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애들 올 시간까지 뭐 하나 제대로 못하고 돌아갈 것 같네.'
불안과 스스로를 비웃는 마음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시작했다는 거에 의미를 둔다. 고개를 흔들었다.
힘을 내고 있다. 엄두가 나지 않아 쌓아 둔 자료를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마음 공간이 단 1mm라도 어제보다 늘어났다면. 그걸로 된 거다. 큰 숨을 한번 내쉬고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조금은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행복이 도대체 뭘까?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렇게 갈망했지만 정작 그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건 아닐지.
"준비, 시~~ 작!!"
아침 등원 길, 막내 아이가 큰 소리로 외치며 신나게 달렸다. 늘 무거운 몸으로 뛰는 시늉만 겨우 해왔지만 이날은 왠지 지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달렸다. 뒤에서 킥보드 바퀴 소리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 봤다. 킥보드를 열심히 밀며 나를 보고 웃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 ‘행복’ 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그 찰나. 너무 순간이라 사소하게 넘겼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점심, 오랜만에 대학원 선배를 만났다. 힘들어하는 내게 시작도 전에 이루지 못할 결과 앞에 주눅 들지 말라고, 그냥 단 한 줄, 단 한쪽 자료를 읽는 걸로 시작해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리고 행복은 순간의 감정인 것 같다고도. 맞는 말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글을 봤다. 평생을 24시간으로 간주하면, 인간은 웃는 시간이 너무 적다며 더 많이 웃고 살자는 내용이었다. 동의한다. 하지만 결론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본다. 웃음은 정말 순간이다. 더 많은 시간을 웃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보다는 짧은 그 웃음이 진한 행복임을 깨닫고 그 순간을 가슴 깊이 느끼고 감사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오후가 되어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었다. 자리를 정돈하고 돌아갔다.
세 아이의 재잘거림과 다투는 소리에 언제나 정신없는 나의 저녁 일상. 고요했던 오전의 스터디 카페나 우아한 점심의 레스토랑과는 전혀 다른 이 온도 차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을 때 잘 서 있을 수 있어야, 누군가와 함께 할 때도 건강하게 너무 의존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심리학자의 조언처럼, 함께 있을 때의 북적거림과 이 혼돈을 즐길 수 있어야 혼자 있을 때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건 아닐지. 우울과 고독이 아니라 잔잔하고 온화하게 말이다. 고요한 오전도, 시끌벅적한 오후도 모두 나의 하루였다.
나는 나의 시간을 채워가기로 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보이는 성과만을 쫓기보다, 힐링을 위해 혼자의 시간을 누려야 한다는 압박보다, 하루의 시간들을 내가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을 조화롭게 조금씩 시간을 쓰는 것으로 결과물을 바라보기로 했다.
완벽해야 한다, 살을 빼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즐거워야 한다, 밝아야 한다, 논문을 완성해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 집중해야 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심지어 쉬어야 한다는 압박까지. 모든 'must'로부터 벗어나서.
그냥 나는 시작했고, 이제 시간을 채워갈 거다.
일명 '시간 때(채)우기 프로젝트'!
몇 줄을 썼는지, 몇 페이지를 읽었는지, 얼마만큼의 생각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오늘 내가 그것을 위해 시간을 썼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시작했고, 조금씩 내 속도대로 하면 되니까.
엄마는 할 수 있다고 조그마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막내. 엄마의 눈빛과 말투, 걸음걸이만 봐도 엄마 기분을 알 수 있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첫째, 울지 말라며 내게 보드라운 볼을 부비던 둘째. 주말에 내 모습을 보고 계속 마음 쓰고 있는 남편. 비록 표현도 공감도 서툴지만 날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일 사람. 내가 돈 걱정 없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일등공신. 나를 좋게 생각해 주고 걱정하고 응원해 주는 대학원 사람들. 연락해 볼까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주위 사람들. 그리고 내 가족들 엄마, 아빠, 동생, 존재만으로도 힐링인 조카. 이렇게 많은 걸 가지고 있음을 자꾸 잊는다.
여전히 두렵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것, 논문을 완성하기까지 남은 숱한 과정들, 엉망진창 난리통인 집과 남편과의 다툼, 아이들의 생떼(?)와 울음, 각종 책임감들.. 그래도 4월 26일, 오늘. 시작했다.
나는 정말 대단하다.
2023.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