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으니까 힘들겠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잠이 덜 깬 눈으로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숫자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르락내리락 몇 번을 확인해도 소수점 하나 변함이 없었다. 물론 어제 저녁을 좀 많이 먹었던 걸 감안하면...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탄수화물 과다와 운동 중지. 며칠 째 앙버터 호두과자를 같이 먹은 동생을 탓할 수도 없다. 내가 시작이었고 주도적이었다.
'그래, 어린이집 보내고 돌아와서 공복 유산소를 하자.'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 아이의 새 팬티가 덩그러니 남아있다. 기저귀를 벗기고 내복만 입혀 보낸 것이다. 분홍 한복에 마냥 신이 난 빨간 코의 얼굴이 떠올라 더 미안해졌다.
선생님께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밤새 온 메시지에 답도 하고 먹을 것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폰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으려다 체중계 숫자가 떠올라 멈칫했다.
호기롭게 자전거에 올라탔다. 물론 폰은 그대로 들고. 혹시 모르니 TV리모컨도 옆에 두고.
자전거가 삐걱거리는 건지 내 몸이 삐걱거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강도를 약하게 하고 일단 발을 굴러본다. 시선과 손은 폰에 고정된 채로. 일단 빠른 비트의 노래를 하나 틀고 시작하자.
'운동할 때 듣기 좋은 음악'
각종 알람들과 메시지들을 보며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첫째와 둘째 방과 후 수업 신청해야 하지, 처음 해보는데 뭘 해줘야 하지? 잘할 수 있을까? 애들도 많은데 수업은 왜 이렇게 적지? 방과 후를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돌봄이 좋은데, 2학년까지인 건 확실한가?
'모르겠다. 신청일에 가서 생각하자.'
학교 앱의 글을 들락거리며 확인하다가 일단 덮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일텐데 음식을 좀 준비해야 하려나? 하기는 힘든데 살까? 그럼 너무 티 나려나?
반찬가게와 네이버 카페 글들을 뒤적거리고,
그러다 애들 데리고 가기 좋은 곳이 있대서 또 들어가 보고. 그러다 이것도 그냥 모르겠다.
온라인마트에 들어가서 장 볼 것들 좀 골라볼까 하다가 닫고.
슬슬 다리가 힘들길래 시간을 확인했다.
아니, 벌써? 29분?
방과 후 수업도, 명절 음식도, 장 볼 목록도, 어느 것 하나 결정하지 못한 채 30분의 시간만 흘렀다는 사실이 순간 허무했다. 그리고 흘러나왔던 노래도 기억도 안 나고 운동은 한 것 같지도 않았다. 더는 힘을 쓰고 싶지 않은 다리와 약간의 땀이 그나마 움직였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흐른 거 같은데 힘은 드네. 아니, 힘만 드네. 시간만 빨리 가고. 이건 좋은 건가?"
구시렁 거리며 일단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래도 아예 누워서 폰만 한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다음에는 좀 더 집중해서 운동을 해서 정말 한 것처럼 하자고 다짐하는 것.
조금 허탈한 마음으로 뭘 고를까 고민하다가 문득 짜증이 났다.
꼭 요즘의 내 삶 같았다. 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만 빨리 가고, 힘만 드는 게.
애매하게 땀이 난 몸뚱이를 샤워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옷이라도 갈아입자 하며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힘이 든다는 건 무언가를 했다는 뜻이다.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누군가 입버릇처럼 말하면 나는 항상 얘기해 주었다.
"뭔가 했으니까 힘들겠지."
허탈해하는 사람에게 격려해 주던 나는, 그 말을 왜 스스로에게는 해주지 못했을까? '한 것도 없이 힘만 드네'가 아니라 '힘이 든걸 보니 무언가를 했구나'라고 말이다.
요즘 나는 계속 힘들다. 다들 무언가를 이루며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그대로 인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내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더 힘들다. 괜찮다고 다독여보지만 가슴을 누르는 압박감을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 나에게 이제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힘들어? 멈춰 있는 게 아니야. 계속 무언가를 애써서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자신을 다그치지 마."
괜찮다는 위로가 아니라 이건 그냥 사실이다. 힘들다는 건 무언가를 했다는 거다. 최소한은 그렇다.
그러니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힘들어만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말자. 뭐라도 하고 있는 내가 엄청나게 서운할 테니.
비록 자전거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선생님에게 카톡을 안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보내긴 했다. 그럼 된 거지, 뭐. 하하. 에휴 힘들어.
"우울과 싸우는 것은 온종일 매달려야 하는 근무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울한 사람은 뇌가 종일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에 대항해 싸우기 때문에 쉽게 피로해지고 잠을 많이 잔다. (중략) 우울한 사람의 게으름은 실제로 몸과 마음이 그를 보호하며 치유하고 있다는 신호다."
데번프라이스, <게으르다는 착각>
2024.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