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 노즐 막힘

딱히 아끼려던 건 아닌데

by 뤼더가든

'인쇄 오류. 프린터 상태를 확인하세요.'

프린터의 주황 불빛만 깜빡거렸다.
오랜만에 인쇄 하나 하려 했는데 이 모양이다.
잔여 잉크량을 표시하는 막대는 채워져 있었다. 새 잉크를 구입해서 얼마 사용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노즐이 막혔나 싶어 카트리지를 뺐다 다시 껴보고, 흔들어도 봤다. 따뜻한 물에 담그기까지 했건만 오류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정품 대신 '가성비'를 앞세운 호환용 제품을 사용했기에 고객센터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애매했다.

손에 잉크를 잔뜩 묻히고 나서야 새 잉크를 주문했다. 프린트의 문제인지 카트리지의 문제인지 알 수 없어 좀 불안했으나 일단 도전. 그리고 다행히 성공.

아마 너무 오랜만에 사용을 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내 비록 신뢰 대신 가성비를 택했으나 그마저 아껴 쓰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굳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사용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국 몇 번 쓰지도 못한 채 새 걸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이건 잉크에 한정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난 그다지 표현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 한다고 하는데 상대는 그걸 잘 못 알아챈다. 굳이 표현을 아낀 건 아니지만 잘 닿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과는 아낀 것과 같은 듯하다.

부모님이 음식이나 물건을 가져다주면 난 분명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다고 하는데,
"우리 ㅇㅇ이는 뭐 줘도 하나도 반기지를 않아."
라며 타박과 비교를 당하기 십상이다.

"와, 맛있겠네. 덕분에 잘 먹겠네."
얼마나 감격스러운 감정의 표현인가. 난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느니
(뭐라더라? 우리 아빠, 나한테 대대하다고?)
이런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

"와우! 정말 너무나 딜리셔스 비주얼이 퐌타스틱이에요. 어메이징! 베리베리 해피해요. 너~무 너무너무너무 땡큐예요!"
이러며 폴짝폴짝 뛰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물론 아님)

사실, 내 이런 성격이 어디서 왔겠는가.
"이거 누가 줬는데, 먹을 만 해. 먹게 생겼으면 먹고. 아니면 도로 가져가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남은 거 던져주듯 하는 부모님.

먹고 싶은 거 차마 못 먹고 일부러 챙겨 와놓고 하는 말이 저렇다.

어릴 땐 부모님의 기대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나를 질책했고, 어른이 된 후엔 나는 이런 사람인 걸, 엄마아빠 닮은 걸 어쩌라고 구시렁거리고 말았다. 애교 많은 뉘 집 딸과 비교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런데 다 못 쓰고 버린 잉크 카트리지 앞에서 그런 나와 부모님을 떠올렸다.

내 성격과 표현 방식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생긴 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과,

나의 방식이 조금은 답답하거나 아쉬울 수도 있겠다는 걸 알고 조금은 어색해도 과하게 표현해 보는 것.

어느 것이 맞는 걸까.
어쩌면 어떤 정답을 택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아끼려던 의도는 아니었으나 자주 사용하지 않아 굳어버렸던 잉크처럼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의 표현들도 그랬던 건 아니었을지.


타고난 성향이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면서도, 나도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가끔은 정말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과한 반응을 기대하게 되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 과한 리액션을 선사하자니 생각만으로도 근질거린다.
어떻게 하면 나의 진심을 전할 수 있으려나.
평소 대화에서도 이모티콘으로 표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제 감동 점수는요... 이런 거라도?

여전히 나 같은 사람이 진실성은 더 있지 않나라고 우겨보고 싶지만, 이제는 다르게 해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스며 나온다.
잉크 카트리지처럼 굳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좋은 방법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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