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정말 무서운 건
그날도 폭염주의보 문자가 몇 번이나 울렸다.
말만으로도 미친 듯이 더운 느낌이 드는 '폭염'.
큰딸이 불볕에 데워진 채 학교에서 돌아왔다. 조용하던 집이 뜨끈한 기운으로 술렁거렸다.
아이는 녹아내릴 듯한 몸을 겨우 끌고 온 듯 휘청거렸다. 새빨개진 볼,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헉헉 거리는 숨소리 끝에 뱉어진 한 마디.
"더워!"
아이는 에어컨의 냉기로는 부족했던지 바닥에 주저앉아 선풍기 버튼을 눌렀다.
"엄마, 진짜 죽을 거 같아. 너무 더워."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선풍기 바람이 호들갑을 떠는 아이의 머리칼을 흔드는 다음 장면을 예상했건만.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응?"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선풍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예 멈춘 것도, 쌩쌩 돌아가는 것도 아닌, 날개가 움직였다.. 가, 거의 멈출 듯하다... 가, 또 조금 움직였다 하는 어정쩡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하하.. 조금만 기다리면 돌아갈 거야."
나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선풍기와 우리 사이의 민망한 침묵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차라리 아예 멈췄으면 안 되나 보다 하고 속시원히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이건 뭐 돌 듯 말 듯하니 희망고문이 따로 없었다.
선풍기 앞에서 풀린 눈으로 기다리던 아이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으악~ 우리 집 선풍기는 다 왜 이래?"
라고 외치면서.
사실 우리 집 선풍기는 애초에 멀쩡한 애들이 별로 없다. 고장 난 전자제품 고치기를 좋아하는 우리 집 '다큰아들'이 지나다니며 버려진 것들을 하나둘씩 주워왔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예전 선풍기와 달리 요즘 제품에는 콘덴서라는 부품이 들어가는데 이게 유독 잘 고장 나고(특히 중국산 저렴이들), 그런데 또 그것만 갈아주면 쉽게 새것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방마다 있는 선풍기는 모양도, 작동버튼도 제각각이다. 나야 선풍기가 돌아만 가면 되지 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조금 궁색해지는 것이었다.
절대 우리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빠의 수리 애호 성향 아니,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지만 소용없었다.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지키는 지구지킴이! 이런 걸로 포장을 할 걸 그랬나.
그래, 결국 이 폭염도 어찌 보면 환경오염의 결과 아닌가. 우리는 더 큰 그림을...
어? 갔니?
이미 가버린 딸아이의 그림자에 괜스레 설명을 늘어놓다가 문득 '폭염(暴炎)'의 정확한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염(炎)'이 더위를 나타내는 말 인건 알겠는데, '폭(暴)'은 무슨 뜻일까?
(여기서 잠시, 아재개그 느낌 가득한 자체 제작 퀴즈!)
1. 폭폭할 폭
2. 답답할 폭
3. 들어갈 폭
4. 사나울 폭
정답은 4번. 그러니까 폭염은 '사나운 더위'였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 더.
눈으로 강하게 보이는 폭우나 폭풍보다 이 폭염이라는 게 조용하지만 사람을 포함한 생명들에게 더 위험한 재난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더위는 그저 견디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어 폭염주의보라는 말 자체가 만들어진지도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재난문자를 보내는 거라고.
역시 조용히 사나운 게 정말 무서운 거다.
그리고 무조건 견디는 것도 역시나 바보 같은 짓이라는 사실까지 한번 더.
우리 집 선풍기처럼 희망고문이 오히려 더 힘든 거라는 깨달음을 쓰려다가 조용한 재난의 무서움을 더욱 느낀 것으로 마무리하는 다소 산만한 오늘의 글.
내일은 37도까지 오른다는 데,
이 사나운 더위 속에서도 모두 건강하고 안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