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부러지지 않으려면

비가 올 듯 말 듯 애매한 날은 인생 같아

by 뤼더가든

오랜만에 남편과 단둘이 나선 평일 낮이었다.

카페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조금 아까운 맑은 날씨와 여유로운 시간,

그렇다고 멀리 나가 밖을 돌아다니자니 내리쬐는 햇볕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곳은 임실 옥정호 출렁다리.

볕은 뜨거웠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꽤 적당했다.

각자 우산을 양산 삼아 하나씩 펼쳐 들고 길을 걸었다.

그래야 편하니까. (실용성을 우선하게 되는 부부 경력 13년 차)


가기 전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출렁다리를 건너려니 두 다리가 먼저 후들거렸다.

투명한 유리 다리 아래로 아무런 보호망도 없이 새파란 호수 물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오니 이름 그대로 다리가 출렁거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예전에는 더 높은 빌딩에서 아래가 훵하게 보여도 별생각 없이 걸어 다녔는데

'안전하게 해 놨겠지!'

그 기개는 다 어디로 갔는지.

나이를 먹으니 늘어나는 건 세상에 대한 불신뿐인가 싶어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자꾸만 유리에 금이 가 아래로 떨어지는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던 것이다.


여기서 물에 빠지면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을까?

이 고요한 호수 한가운데에 풍덩 떨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았다.

(아, 물론 남편이 있긴 하지만, 그도 하늘을 날아 나를 건질 수는 없겠지.)


오만 잡생각과 호들갑을 떨며 다리를 건넜다.

호수의 고즈넉한 풍광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감성에 젖은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호들갑을 떨며 돌아오는 데

바람이 휙 불어왔다.


들고 있던 우산이 휘청거리다가 그만 뒤집어지고

결국 우산대까지 부러지고 말았다.

'아, 내가 아끼던 고양이 우산!'

혼자 중얼거리는데 남편이 까만 우산을 들고 선인처럼 조언한다.

"바람이 불 때는 흐름을 잘 타야 해. 뻗뻗하게 맞서지 말고."

이미 우산은 망가져버렸지만, 놀라고 말았다.

이 사람이 이런 철학적인 말을 한다고? (아니, 꿈보다 해몽인가?)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대만의 101 타워를 방문했을 때였다.

101층이라는 높은 건물이 지진과 태풍에도 잘 견딜 수 있게 하는 주요한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진자댐퍼라고 했다.

우린 모두 엄청나게 커다란 쇠구슬을 보며 감탄했었다.

그리고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바람에 어느 정도 흔들리게 설계되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말도.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구나.

전혀 흔들리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부러지게 만들 수 있구나.

바람이 불어올 때는 맞서지 말고 그 바람을 잘 타야 하는구나.


우산 하니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얼마 전, 비가 올 듯 말 듯 애매한 날씨였다.

회색빛 구름들이 넓게 펴진 흐린 하늘에 틈 사이로 새파란 구멍이 보였다.

인생이랑 닮은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을 그 뒤에 새파란 하늘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많은 일들이 비가 오듯 쏟아지지만

결국엔 파란 하늘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행복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러니 우산을 준비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잠시 빗소리를 듣는 것도

가끔은 비를 맞으며 여러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비가 그치면 여전히 거기에 있을 파란 하늘을 기다려보는 것도 썩 괜찮은 것 같다고.


그때,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내 다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결국 이 빗방울이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흔들리는 건

당연하구나.

괜찮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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