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여행기. (10)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7시 30분쯤 일어나 씻고 전날 구매한 야채와 과일로 아침을 준비했다. 냉동 블루베리와 큐빅 형태로 잘린 아보카도, 양파 반쪽을 넣고 거기에 적당량의 양배추와 닭가슴살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두유를 넣고 믹서를 돌리면 끝이었다. 오늘 아침 기상 모임의 인증은 이것으로 대신했다. 여기에 인터넷 주문한 아몬드와 호두만 넣으면 꽤 좋은 식단 관리용 음식이 완성되는 셈이었다. 브로콜리도 사서 넣을까?
식단의 목적은 첫째는 당연히 말이지만, 근육 형성과 피로 회복이다. 그다음은 음식을 먹고 이후 빈둥대는 시간을 줄이고자 함에 있다. 이렇게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고개를 돌리지만, 생각보다 제법 맛있다. 세끼 식단은 이렇게 하고 중간에 간식으로 구운 계란을 먹을까 한다. 몸을 만드는 것은 운동이 약 2할 정도라면 먹는 게 8할을 차지한다. 일반적인 운동은 근육의 성장과 지방을 태우고 체력을 향상하지만, 칼로리 소모는 크리 크지 않다. 그 때문에 살을 빼려면 먹는 양을 조절하거나 양질의 식단이 필요하다. 특히 나처럼 잘 안 챙겨 먹는 경우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이 잘 성장하기 어렵다. 탄수화물 위주의 건강하지 않은 식단을 먹거나 식단을 고려하지 않으면, 운동을 해도 근육이 붙지 않고 오히려 살이 더 찌기도 한다.
먹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운동에 우선 초점을 둘 게 아니라 먹는 것에 우선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운동은 대체로 피부 지방층 뒤에 있는 근육의 탄력을 높인다. 체력 향상만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효율을 위해서는 먹는 것을 신경 써야 한다. 먹는 것이 연료이면 운동은 그 에너지를 신체 각 부위에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소비되지 않은 연료는 몸에 계속 비축될 뿐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음식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활용하지 않으면 단지 비축될 뿐이다. 그리고 계속 비축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정신의 운동, 즉 다상량과 다작을 통해서 소비해야 한다. 좋은 책을 보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다작과 다상량을 위해서는 좋은 책이 그렇지 않은 책보다 더 효율적이며 건강한 정신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아침을 먹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영어 모임을 했다. 더욱 철저하게 학습할 필요를 느낀다. 영어를 단순히 잘한다는 수준을 넘고 싶다. 이번 주말에는 영어만 몰입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 하는 것들은 온 힘을 다해서 뭔가를 남기고 싶다. 영어뿐만 아니라, 말, 글, 취미 활동 그 모든 것들을 잘하고 싶다.
탁월해지려면 단지 소망만 할 게 아니라, 마치 내가 이미 전문가가 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는 오만함과는 다르다. 내가 실력이 안 됨에도 잘난 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건성으로 넘기기보다 마치 전문가처럼 신중하고 탁월하게 할 듯이 행동해야 한다. ‘나는 프로다!’ 이런 마음가짐이 태도를 바꾸고, 그 태도가 습관처럼 쌓여 탁월함이 되는 것이다. 정진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까닭이다.
점심 역시 아침과 유사하게 먹고 한 30분가량 낮잠을 잤다. 피곤함이 가시지를 않아 따로 영양제라도 챙겨 먹여야 할 것 같다.
오후에는 학교의 IT 카페로 가서 다시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보았다. 에른스트 마흐가 언급한 사유경제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나왔다. 사유경제의 의미를 간단히 말하면 일정한 패턴의 경험 총체를 하나의 단순한 사유로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유(생각)의 경제적인 절약을 꾀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많은 과학자가 갖고 있는 생각이며 찾아본 바로는 아인슈타인 역시 이 이론을 언급한 에른스트 마흐의 역학 발달이라는 책의 팬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인슈타인은 사유경제설을 두고 진부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사유경제의 원리가 심리학적인 부분에서 경제적 절약이 이루어지는지, 논리적 경제인지, 주관적 측면인지, 객관적 측면인지, 어떤 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지 않고 그저 단순화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마흐가 어떤 식으로 전개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유경제설'이 과학의 진보에 관해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라는 그의 생각 보면서 문득 많은 이들이 즐겨 말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것을 개념이라 하지 않고 그저 '말'이라고 한 까닭은 어떤 원리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현상을 단순화한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더는 사고하지 않는 도덕적 결여를 볼 때 너무나 쉽게, 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꺼내어 쓰고 스스로 그 말을 한데에 만족한다. 사유 경제성 측면에서는 이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따라 이 현상에 대한 복잡다단한 전개 과정이나 심리 과정, 논리적 전개 등등에 대해 더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말은 언뜻 신선한 것 같으나 그 말의 본의인 banality만큼이나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진부한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책 "예루살렘과 아이히만"의 마지막에 이 말을 배치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독자는 책 전체 가운데 그 한 마디만을 마치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그녀 역시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재판의 전개를 낱낱이 기록한 까닭은 그 과정에서 발생했던 일들을 통해 해당 재판이 가지는 의미나 단순히 인간 혐오로 쉽게 결정짓는 것이 아닌 보다 보편적 견해에서 ‘전쟁이 어떤 인간을 만드는가?’ 등을 살펴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책을 단순히 악의 평범성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만을 두고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이야기하거나 시장 경제를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문득 악의 평범성을 생각하면서 요즘 유머 게시판에서 쉽게 하는 말인 '실업자가 된 사탄'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그 사건 중에는 자신이 벌인 일이 법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하는 예도 있으나, 반면에 아예 인지를 못 하고 하는 때도 있었다. 전쟁 상황을 고려해야 하거나 또는 혐오 범죄임을 입증해야 할 상황에서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 입증하지 못한 아이히만의 재판 사례와 이 ‘실업자가 된 사탄 시리즈’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는 유사한 점이 있다.
다만, 그것은 심리적 측면 일부일 뿐이고 또한 ‘실업자가 된 사탄 시리즈’는 아이히만의 법정 주장대로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일이라기보다 도덕성을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행위가 많다는 점 등의 여러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이해하려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 하나로 전체를 본 것처럼 여길 게 아니라 그 과정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읽지 않은 책’의 내용 대해 말할 때는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으나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저녁에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마저 보았다. 소설도 거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엔도 슈사쿠의 책을 보면서 내가 가진 일본 문학에 대한 편견 중 하나인 일종의 그로테스크함은 사라졌으나 인간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차원에서의 이미지는 벗어버리질 못했다. 이러한 심리적 의미에서는 그로테스크함이 있다고도 여겨지는데,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슬래셔 무비의 그로테스크함이라기보다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다가 만나는 그로테스크, 즉 음산함에 가까운 마음, 어두움에 가까운 마음이다.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고 절망할 수 있으며 체념으로 가는 마음, 단순히 서정적이라기보다 심해의 깊은 바다와 같은 죽음의 그림자나 악마 같은 동물들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마음이다. 나는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푸릅니다."라는 이 책의 띠지에도 적혀 있는 유명한 독백에서조차 짙은 바다, 어둠의 심연이 존재하는 바다를 느낀다.
어쩌면 이러한 일본 문학의 그로테스크적인 이미지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일본 문학에 대한 비판적 생각이 내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루스 베네딕트가 상징적으로 말한 "국화"라는 개념과 "칼"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아온 일본 문학의 심연에는 고요함과 죽음과 같은 그림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침묵 속에 비롯되는 생각들, 죽음마저도 의연하게 만드는 마음들이 복합적이며 서정적이며 또한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난다.
저녁을 먹었으나 수지와 성영 부부로부터 소고기를 사준다는 연락이 왔다. 오히려 내가 사주고 싶었으나 현재 내 사정으로는 부담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런 곳에 가자고 하면 미안하고 혹 비싸지 않은 것을 내가 사줄 때에도 더 좋은 걸 사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여하튼 음식 때문이라기보다 보고 싶은 마음에 갔다. 결혼하고도 근처에 살면서 연락도 못 해서 늘 미안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없어 못 사주는 걸 미안해하자 이들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날 배려해주었다.
나는 보답해야 할 사람이 참 많다. 그들이 비싸고 좋은 것을 사서라기보다 이들이 보여주는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워서이다. 그 아름다운 별들이 나의 밤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 나는 괴로워진다. 이들의 마음만큼 내 마음을 보일 때가 오기는 올까? 나는 아직도 조금은 어두운 하늘에서 침묵할 따름이며 나에게도 작은 별이 주어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