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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ug 29. 2019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1928-9) or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 사진에 관하여 -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 그 사진이 사실과 진실을 담고 있음을 기대한다. 그래서 그 사진이 적나라하거나 잔인할수록 그곳에서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다르고 끔찍하다고 여긴다. 그림의 경우 사진처럼 완전히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적다. 또한, 글처럼 작가의 상상력과 해석에 따라 변한다고 여긴다. 사물을 그리는 정물화나 풍경화 또는 초상화조차도 우리의 시각으로 인식하는 실제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림이 아무리 이것이 “내가 본 실제 장면이다, 혹은 현실이다.”라고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짜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진은 다르다. 우리는 마치 거울이나 우물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나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오른손을 들으면 거울도 같은 손을 들고 왼쪽 눈을 찡그리면 마찬가지로 똑같이 찡그린다. 또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눈으로 보는 나의 신체와 동일하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나의 행동을 똑같이 한다는 차원에서, 두 눈으로 보는 나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같다는 차원에서, 거울에 비친 존재는 결국 ''나''임을 증명하게 된다. 사진 역시 그러한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사진기를 갖다 대고 찍은 사진 속에서 방금 전까지 내 눈으로 본 피사체의 단면이 그대로 찍혀 나온다는 점은 사진이 그림과 달리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인식을 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사진 같은 그림, 그림 같은 사진은 어떨까? 포토샵이나 사진기의 필터는 사진을 왜곡한다. 사진을 만화와 같이 만들기도 하고 장난감 세계처럼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리얼리즘, 또는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이름 아래 그려진 그림은 실물보다 더 실제처럼 정교하다. 인간의 눈으로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세밀한 주름조차도 정교하게 그려낸다.

  이럴 때, 그림이라는 단어와 사진이라는 단어에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가 다소 깨지게 되고 그 정교함에 따라 혼란을 겪는다. 그림이 사진처럼 되고 사진이 그림처럼 될 때, 우리는 정교한 그림에 등장하는 모습이 ‘진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만화 같은 모습의 사진 역시 우리는 왜곡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사진’과 ‘그림’이라는 단어가 가진 오래된 환상은 워낙 단단해서 완전히 깨어지지 않고 다만 ''그림 같은 사진’, ‘사진 같은 그림''이라는 비유적 수사가 덧붙여진다. (그러나 사진과 같은 그림에 “이것은 그림이다”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으면 사진과 비슷한 인식을 할 것이다.)


Le Basier de L''Hotel de Vilne, 1950. Gelatin Silver Print, Signed (시청 앞에서의 키스)


  사진이 갖는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예술성 또는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연출되거나 조작되는 사진들은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광고 사진은 상업성을 극대화한다는 차원에서 진실성이 내몰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광고 사진들을 보면서 이것이 진실일 것이라는 무의식적 착각을 한다.) 보다 극적인 효과, 사진이 주는 인상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사진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Faction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치 가상의 그림과 가상의 이야기가 진실을 더 잘 밝혀주기도 하듯이, 현실의 이미지를 차용한 가상의 이미지는 소설이나 그림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의 반복적 노출과 (거대 자본이 등 뒤에 있는) 허용은 우리를 기만한다는 생각보다 으레 그러려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그러한 사진이 우리를 기만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것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또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면서 35mm 휴대용 라이카 카메라가 등장했다. 그전까지의 보도사진에는 어떠한 현장감을 기대하거나 진실성을 기대하기는 사실 어려웠다. 사진은 정적이거나 혹은 연출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서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의 사진기는 쉽게 휴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보도 사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었다. 휴대성이 강화되면서 현장에서 실제 전투 중에 찍히는 사진들이 많아졌고 점차 보도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저널리즘의 한 영역이 되었다. 그것은 기사를 보충하거나 그 자체가 증거자료가 되어 기사가 가지는 진실성을 좀 더 강화시켜주었다.

  그 사진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사에 관한 개개인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충격적인 이미지들을 전달했다. 그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의 상상을 구체화하였고 실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명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로써 사진이 주는 특수성은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가 아닌 ''이것은 사실이지 않을까?''라는 물음표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2. 타인의 고통 - 무감각해지는 법.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은 이러한 이미지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이미지로 접하는)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바라볼 수밖에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단순히 연민 수준에서의 인식을 넘어서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미지가 가지는 문제점, 미디어에서 다루는 전쟁, 파괴 등의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인식은 하지만, 왜 그것을 쉽게 외면해버리는지를 고찰한다.

  이미지 생산과 복제는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이는 기존에 언론이나 전문 사진작가들이 찍어오던 이미지를 뛰어넘어, 쉽게 카메라를 들이댈 뿐 아니라 쉽게 전파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2011년, 튀니지, 이집트(심지어 현재 홍콩에서)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시위와 그에 대한 폭력 진압에 관하여 미디어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제 TIME이나 뉴욕 타임스 같은 전문 언론 기관이 아니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업로드되는 사진과 글은 그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 바깥세상에 알렸고 또한 전 세계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지지가 변화를 이끄는 것은 아니었다. 지지를 한 많은 이들 중에서는 그것을 보고서도 사이버 세상 안에서 평상시처럼 ''좋아요''나 ''RT''를 무감각하게 누르는 이가 있었고 또한 당장 그것밖에 할 수 없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잊지 못할 사진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화물까지 포함하면 약 1만 톤에 달하는 배가 거꾸로 뒤집힌 채, 뉴스와 신문 전면에 도배되었기에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사진이다. 사진의 아래쪽에는 ‘전원 구조 성공’이라는 커다란 자막이 있었다가 이내 다른 말로 교체되었다. 뒤집힌 배와 그 배 주변을 맴도는 작은 배들, 통곡하는 유가족들의 이미지가 연일 뉴스의 첫머리에 등장했다.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될 무렵, 여러 이유에 의하여 그 이미지를 보지 않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생겼고, 어떤 이유에 의하여 조롱하는 사람이 생겼으며, 어떤 관점에 의해 유가족들의 집단행동을 정치적인 목표를 가진 나쁜 이들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이미지의 계속되는 재생산과 반복이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무감각해지도록 한 것일까? 혹은 혹자의 말을 빌려본다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죽은 이만 쳐다보고 있을 것인가?’처럼 산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힘들더라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차원일까?

  무엇이 되었건, 어쨌거나 과거의 고통은 잊고 무감각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과거의 고통을 외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나의 고통이 더 우선하니 죽은 자가 느꼈을 법한 고통은 미뤄두자는 말이다. 이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상상력의 실패이고 공감의 실패인지, 혹은 일부러 떠오르는 망각을 잊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우리는 고통스러운 것을 직시하거나 인식하려 하기보다는 외면하려 한다는 것이다.  



3. 타인의 고통 - 연민을 넘어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저술한 프리모 레비는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그 커다란 고통의 추억 앞에서 크게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는 말을 한다.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이 수용소 앞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혹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어서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결국 다 잊어버린 사람들, 모든 것을 지우고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나는 대개 이런 사람들이 불운 때문에, 그러니까 정치 활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다가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고통은 사고나 질병 같은 트라우마일 뿐, 의미나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은 낯선 어떤 것, 그들의 삶에 난입한 고통스러운 물체였다. 그들은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혹은 아직도 애쓰고 있다). 둘째 부류는 반대로 ‘정치적’이었던, 혹은 어찌 되었든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포로들이다. 이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다. 그들은 잊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의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84~285p, 2007. 돌베개〉


  고통을 겪었던 이들조차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을 보인다. 지옥으로부터 구조된 그들 역시 고통을 받은 장본인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주변에는 같은 수용소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타인이 존재했다. 「상기하기」를 할 때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상기도 있지만,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상기도 이에 포함된다. 고통을 당한 사람조차도 반복되는 기억의 재생에 대하여 망각하고 무감각해지기를 바라는데, 이미지로만 겪는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 타자이다. 우리는 절대 이미지로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사진을 보며 눈물짓고 동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충격에 따른 그러한 연민은 금방 무감각해진다. 마치 가까운 이가 죽고 나면 삼일장을 치르고 나서 평상시의 무감각한 생활로 돌아가다가 간혹, 어쩌다 한 번 떠올리다 말듯이…. 연민은 짧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연민이 아닌 수치심을 부르짖었다.


그는 그 대신에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마음을 쓴다. 참으로, 나는 연민의 정이라는 것을 베풂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저 자비롭다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도 수치심을 모른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혹시, 슬픔과 연민을 앞세워 즐기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마치 오늘의 날씨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러한 타인의 고통과는 상관없다고, 우리는 그런 사건에 대해 결코 연루되어 있지 않기에 저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연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상관없는, 영화에 나오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그것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54p.〉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들이 아니라 우리는(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연민이 아닌 보다 적극적인 행위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절대,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연민 이상의 무엇을 해보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전쟁조차도, 같은 지구 상의 존재가 겪는 여러 문제와 고통에 대해서 우리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방조해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우리가 가지는 수치심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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