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튜브에서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바로 어린아이들과 아빠가 나와서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축구선수 박주호 씨 가족을 주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처음 유튜브 비디오 클립으로 접한 게 그의 딸과 아들인 나은이와 건후였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없다. 일하거나 공부를 하고 잠깐씩 휴식이 필요할 때 보곤 하는데, 천사처럼 작고 예쁜 아이들이 나와서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보는 나마저도 순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이 두 아이를 보면 놀라운 느낌도 받는데, 그 까닭은 어린 나은이가 다개국어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건후 역시 언뜻 들리는 옹알이 속에서 누나를 따라 다개국어를 할 징후가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 건후가 의도하고 어떤 의미를 담아 옹알이를 하는 건지, 혹은 편집국의 PD 나 자막 제작자가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하여 임의로―대체로 그렇겠지만―옹알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자막을 달아두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무엇이 되었건 그 옹알이 속에서 들리는 한국어와 독일어의 가능성을 보노라면,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다중언어를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기들의 언어적 감각은 예로부터 많은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이는 조기 교육 열풍으로도 이어지기도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옹알이 단계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를 티비에서 보고 있노라면, '미래의 내 아이를 위해서 다중언어를 장착할 수 있도록 조기 교육을 하거나 결혼을 외국인과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귀여운 아기의 다중 언어적 옹알이를 보면서 생후 24월 이전 아기의 무한한 가능성에 관하여 관심도 가지게 되지만, 동시에 '옹알이' 자체에 관심이 가기도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옹알이가 교회에서 어른들이 기도할 때 쓰는 방언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마, 교회를 다니거나 다녀본 사람은 '방언'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거나 실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방언'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을 것이다.
'방언'은 언어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이르러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인데, 교인들은 이러한 방언을 통해 기도가 좀 더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을 믿는다. 이 방언을 언뜻 보다 보면,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자 신이 진노하여 언어를 분화시켰다는 바빌론의 신화에서 다시 언어를 통일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방언의 재밌는 점은 언어적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방언을 하다 보면 어둠 속에서 무의식적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기의 옹알이와 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을 그대로 전달한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러한 방언 속에서 불교의 불립문자와 같은 상태 혹은 다른 종교의 접신과도 같은 상태가 된다.
어쩌면 아이의 옹알이 단계에서의 무한한 언어적 가능성은 그것이 언어적 체계를 아직 갖지 못한 단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방언은 이를 역행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현세에 살게 되면서 잃어버린, 오로지 갓 태어난 아이들만이 그 흔적을 가지고 있는 천국의 언어를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이랄까? 그래서 방언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심연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옹알이이다. 옹알이를 통해 어른은 말로 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하늘에 대고 이야기한다. 마치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건후가 알아들을 수 없는 비슷한 옹알이를 하면서도 종종 그 속에 뜻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 것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방언' 속에서도 마음의 언어는 계속 작동한다. 그러는 와중에 건후는 자기가 하는 천국의 언어가 현세의 인간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행동을 통해 이해를 시키고 점차 바벨의 언어와 몸짓 문화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방언'은 체계화되어 인간에게만 쓸 수 있는 문법을 다시 깨뜨린다.
어린 시절에 이러한 방언을 보면, 신앙이 깊거나 기도력이 높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라 여겼고 '방언'을 하는 것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교회 바깥에서 이들을 보면 '광신' 내지는 '접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상하기도 했지만, 교회 안에서 보면 이는 실로 대단하며 부러움을 살만한 것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그 장면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주여,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을 때, 모든 것들을 다 토해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갈구하고 부르짖으며 자신을 절대자에 내맡길 때, 비로소 마음속의 슬픔이나 울분이 풀리고 모든 것들이 정화된다는 느낌을 받으며 동시에 온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충만감이 가득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일상의 공허함을 메꿔줄 수 있는 경험이며, 이러한 경험을 성령의 충만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충만을 경험하거나 혹은 비슷한 느낌이라도 받으면 그 충만하면서 건강한 기쁨을 더 갈구하며, 그 끝에 서 있다고 여기는 저 방언하는 자를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언이 성경에 나와 있는 '마가의 다락방' 에서처럼 성령의 불이 내려온 자, 신의 은총이 있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신비한 능력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마가의 다락방 사건은 '방언'이 등장한 최초의 사건인데,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승천 한 이후에 120명의 사람이 모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를 열흘 동안 하고 오순절(부활절(復活節) 후 50일째 되는,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축일)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사도행전 2:4)' 일화이다.
이러한 성경적 언급은 방언을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성령이 불같이 내려와 충만해지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에 따르면 방언 역시 배우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언어를 배우듯이 배우는 건 아니며, 마치 '옴마니밧메훔'의 중얼거림이나 또는 발성법처럼 기본적으로 혀를 어떤 식으로 쓰는 게 좋은지 등을 배우는 것이었다. 마치 자전거 타는 방법을 초반에 배우고 그것을 한번 익히고 나면 그다음부터 중요해지는 것은 어떻게 자전거를 활용하여 원하는 위치에 갈 것인가, 어떤 노력을 통해 묘기를 할 것인가, 또는 어떤 노력으로 체력을 기를 것인가가 중요한 것처럼, 단지 방언의 기술을 배우는 것뿐이다. 이는 육체라는 지상의 것에 영혼이 얽매여 있으므로 부득이하게 소리를 활용하는 것에 가깝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물론 마가의 다락방의 120인처럼 부단한 기도와 믿음을 통해 종교적 충만감이 고양된 상태에서 해야 맞다. 그 까닭은 그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이러한 방언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울뿐더러, 방언에 자신의 마음을 실어 보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강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학습 방식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방식은 마음을 싣는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나로선 불교의 불립문자나 염화미소가 담고 있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방언의 방식은 엄연히 '방언'이라는 소리음이 존재하고 '불립문자'는 '문자(언어)'를 세우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서로 지향하는 바 역시 다르기는 하나, 무엇보다 문자화 된 언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중얼거림이란 의미에서는 '옴마니밧메훔'이나 '나무 관세음보살'을 반복적으로 외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단순화된 형태에 마음 또는 생각을 싣는다고 할 때, 또한 떠오르는 것은 피카소의 '소' 연작이다. 그가 그림 11단계의 소의 그림을 보면 형태를 가진 정교함에서 점차 시간을 두고 단순화된 형태로 바뀐다. 그 과정에서 육중하고 정교한 형태를 자랑했던 소는 누구나 그릴 법한 선 몇 개로 이루어진 소가 된다. 아마 이 연작에서 마지막 혹은 마지막 이전의 작품만이 존재했다면, 누구나 이것을 보고 “나도 쉽게 그리겠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작품에 도달하기까지 피카소는 10단계를 거쳐야 했고 단계마다 그다음 단계를 위하여 숙고했을 것이다.
아이의 옹알이 같은 '방언'이 가진 것, '불립문자'가 지향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런데도 그 마음의 자세는 다른 것이다. 마음이 고양된 상태에서 방언이 도구로 사용돼야 하는 거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럴싸하게 방언을 쓴다고 해도 소용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 연작, 11단계의 석판화, 29 x 37.5cm, 1945~46》
건후의 옹알이 속에서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독일어나 한국어, 그리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이제는 4개 국어를 하게 된 5살의 나은이를 보며 그리고 언어 분화 단계 이전이라고 여길 수 있는 옹알이와 유사한 방언을 보면서 이미 문자로 된 언어를 습득하게 된 사람은 어떤 식으로 언어 공부를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옹알이 속에서 언어를 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접목할 수 있느냐인데, 어쩌면 머리속에 이미 각인된 소리가 문자(의미)로 체계화되는 과정을 다소 깨뜨리면 어떨까하는 점이다.
영어를 기준으로 하여 현재 내가 공부하고 있고 실제로 효과를 본 학습방식은 패턴 암기 방식이다. 하루에 6개의 패턴을 바탕으로 각각 세 문장씩 암기하고 단어보다 문화를 이해해야만 알 수 있는 표현 한 가지 정도를 매일 암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누적하여 암기한 5일 치 패턴을 계속 선입 선출 방식으로 반복 테스트하는 게 지금의 주된 방법이다. 물론 매일 20개 미만 정도의 단어를 암기하고 있고 매일 주제를 바탕으로 단어와 패턴을 활용하는 회화를 30분가량 하고 있는데, 누적된 패턴이 자연스럽게 회화 가운데 튀어나오거나, 암기한 문장으로 유사하게 회화에 활용할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3년가량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빠짐없이 하니 이제는 웬만한 일상 회화는 지장이 없는 편이다. 문제는 지금 수준을 넘어서 듣는 수준을 미국 드라마를 막힘 없이 듣고 이해하는 원어민 수준에 이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점이다.
우선은 듣기의 절대량을 늘려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영어 학습이 본업이 아닐뿐더러 매일 2시간가량을 할애하고 있었기에 추가로 영어 듣기 시간을 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그 시간을 낸다고 하더라도 들으면서 의미를 파악할 때, 쉽게 지루해지거나 피로감이 밀려왔다. 의미를 파악하면 집중하기 또한 힘들었다.
이런 과정 중에 아기의 옹알이 방식은 내게 "영어를 학습한다"라는 사고방식을 뒤바꿔줄 만한 것이었다. 우선은 아기처럼, 혹은 방언을 하는 사람처럼 의미 해석을 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옹알이하더라도 그 소리 자체를 집중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생각했다. 강세나 억양 등의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기존에 쉐도잉을 할 때는 쉐도잉을 하면서 동시에 의미 해석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 보니 이에 따른 에너지 소모가 심했고 해석이 잘 안 되거나 속도를 놓치면 스트레스를 받아 쉽게 지루해졌다.
아이가 부모의 언어를 듣고 배워가는 옹알이 단계에서의 말하기처럼 쉐도잉을 할 때, 말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끊임없이 말하고 못 하는 부분은 옹알이처럼 따라 하는 것, 의미 해석에 너무 묶여있지 않고 그저 듣고 따라 하는 방식은 저러한 스트레스에서 다소 벗어나게 했거니와 영어 듣기와 쉐도잉을 마치 대중가요를 듣고 따라 부르는 느낌마저 들도록 했다. 아마 이게 사고방식의 변화 이후 가장 큰 변화인 듯싶은데, 영어 듣기의 지루함이 사라지자 평소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던 시간에 영어를 하나의 리듬감이 있는 노래라고 생각하고 듣게 되었다. 재밌는 점은 해석의 강박에서 벗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말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뇌의 신비로운 점인데 자면서도 혹은 의도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두뇌는 계속 정보처리를 하는 것처럼, 영어를 의식적으로 번역하지 않더라도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말을 들을 때 따로 어떤 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듣기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집중이 중요하다. 옹알이하는 아기가 부모의 소리와 반응에 집중하듯,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마치 노래를 잘 따라 부르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들어야 하느냐와 같은데, 감정을 전달하는 박자와 리듬, 템포, 강세 등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그다음 가사가 전달하는 의미의 해석을 해야 한다. 물론 내용적 의미는 리듬, 템포, 강세 등의 형식적 표현 방식을 통해서도 강하게 전달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듣기를 하는 것이 수많은 언어 학습 방법 중에서 얼마만큼 효율적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 듣기에 따른 지루함을 극복하고 음악처럼 들으며 다소 옹알이처럼 말하더라도 쉐도잉을 즐겁고 부담 없이 할 수 있도록 태도를 바꾼 것은 확실하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을 듣듯이 반복적으로 듣고 따라 하면서, 옹알이가 점점 언어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방식에 관한 의심이 점점 줄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언어 학자가 아니므로 모두에게 내 방식이 바르다고 확신까지는 할 수 없다. 다만 방언의 기술을 배우고 방언을 할 때처럼, 그저 일단은 스스로 믿고 꾸준히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