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는 것의 의미.

약 3달간 매일 글을 쓰면서.

by Chris
사진 : 제임스 조이스(1882년 2월 2일 ~ 1941년 1월 13일)


한참이 지나, 다시 쓰는 삶의 기록이다. 다른 글 작업과 더불어 아침 모임이 끝난 이후로 제임스 조이스의 말을 인용한, '내 삶은 살기에 적당한가?'라는 제목으로 쓰던 글 역시 마감을 했다. 그렇다고 일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신데렐라나 춘향전에도 이야기로서 해피엔딩의 결말이 있으나 그것이 실제 삶이었다면, 그 삶은 이야기의 결말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다만, 어느 시점에서 적절하게 끊어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정리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 삶은 살기에 적당한가'라는 일상의 이야기는 아침 모임을 하면서 시작했다면, 마찬가지로 모임이 끝나는 날에 정리하는 게 옳았다고 여긴다. 그런데도, '쓰는 삶'이 약 3달간 지속하다 보니 어느덧,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는 삶의 중심에 와 버린 상태였기에, 그것을 정리하고 다른 글을 쓰거나 그 시간을 다른 일로 할당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새로운 글의 소재나 방향을 찾는 일에도 쉬운 일이 아니었거니와 꽤 많은 분량의 글을 정리하고 블로그에 올리기까지의 과정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 퇴고는 글을 쓰면서 들인 시간 이상으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일을 하는 과정 중에 최고의 성과는, 과거라면 이러한 글은 완성 후에 그저 서랍에 들어가거나 혹은 하드 디스크 저장 공간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세상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었으나, 자유로운 연재가 가능한 이 공간을 알게 되면서 꾸준히 기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의 글을 봐줄 독자를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고 신경써서 정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독자라는 다수의 사람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기에 조금은 부끄러웠고 또 조금은 긴장되는 일이기도 했다. 완벽주의 성향은 아니었으나, 누군가가 읽을만한 글이 되기 위해서는 기존처럼 그냥 적어두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읽을 만한 문장, 앞뒤 문장 간에 어색함이 없는 문장이 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퇴고를 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출판이 아닌 수정이 끊임없이 가능한 블로그라는 점을 이용하여 발행 후에도 글을 수정하곤 했다. 글을 어떻게 완성은 했지만, 엉망인 글을 다시 볼 때 언제나 부끄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30년 이상의 인생이 지금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지내게 된 까닭은 어쩌면 부끄러움을 마주하기보다 피하고자 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정작 무언가를 잘하고 싶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도 나에게 가해질 대중의 눈빛과 실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마주하기가 싫어서 늘 그렇게 피해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매일 꾸준히 글을 정리하고 올리는 일은 비단, 글에 대한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일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대한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용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마주하고 올린 글을 좋아해 주는 이들을 보며, 내 인생은 무가치하지 않으며 내 노력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쓰다 보면 예전에는 내가 그저 방 안에만 머물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평가를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난받기 두려워서 나의 글은 서랍에서 잠들고 나 자신은 조용한 내 방 한가운데에서 문을 꽉 닫고 연습하고 있었다. 내 실력을 대중에게 내보이고 평가받아야 하는 일에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노력은 이를 극복하는 나 자신의 새로운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으로서의 글쓰기를 잠시 중단했었지만, 이제는 다시 써야 할 때라고 느낀다. 긴 글을 쓰던 시간이 줄어들자 그 시간이 게으름으로 차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조차 글을 썼다면, 이제는 전처럼 인터넷 뉴스나 오락, 또는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해야 할 것들이 없어지고 나서는 과거의 익숙해진 습관으로 돌아간 것이다. 할 일이 시간을 만드는 것이지, 시간이 할 일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한 투쟁이 정신적 동기라면, 빈둥거림을 비교적 생산적인 일로 만드는 게 구체적인 동기였다.

이 일이 생산적이라고? 적어도 개인의 발전 측면에서는 그렇다. 꾸준한 글쓰기 연습이 될 뿐 아니라, 그 연습을 통해 조금 더 나은 문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매번 마주치는 문장의 수많은 오류를 보고 다듬어 조금 더 실력을 높일 수 있으니, 생산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더구나 혹시 알겠는가? 훗날 이러한 글들이 내 정신적 삶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경제적 삶 역시 바꾸게 될지.

물론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소설이나 다른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전처럼 이 글을 쓰는 데에 종일 시간을 사용할 수는 없다. 다만, 모든 시간에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완전히 이룰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이동 시간, 쉬는 시간 등의 시간의 빈틈에서 그러한 소망의 흔적을 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기 통제를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다시 아침 모임을 만들어야겠다. 아침 모임이 준 수많은 이득 중에서 가장 좋은 이득은 '함께 할 때 멀리 갈 수 있다.'라는 가치였다. 내가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다짐을 한 것도 있지만, 그 다짐을 이끌어가는 데에 있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주변에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기상 모임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뿐 아니라 삶의 기준점이 되어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야만 한다는 다짐을 최우선 순위로 두어 그다음 시간에 정해놓은 일들을 비교적 쉽게 관리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침 모임은 자기 통제를 방해할 만한 것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토록 했다.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주로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하지 말자'라는 다짐을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의지를 방해하는 것들이 주변에 많은 상황에서는 강력한 의지가 없을 때는 유혹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강력한 의지가 있더라도 유혹이 많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으며,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맹자의 어머니는 일찍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아이가 교육을 수월하게 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 주었다. 아침 모임이 주는 효과도 그와 비슷하다. 어느 한 공간에 모여 공통의 일을 도모하는 것은 그 분위기를 만드는 행위임과 동시에 컴퓨터 게임이나 유튜브와 같이 자신을 방해하는 요소를 비교적 쉽게 차단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오롯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나의 의지뿐 아니라 환경을 바꾸어야 했다. 사실 의지는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니 언제나 방법은 환경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종합하면, 무엇을 강력하게 막는 것보다 환경을 잘 조정하여 합리적인 선택을 스스로 하도록 이끄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해야 할 일의 순서는 전처럼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무엇을 할지를 정하며 세부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세부 전략을 세울 때는 앞서 말한 대로 그 실행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다, ~하자'와 같은 표현이 의지의 반영일지라도 그것을 실행하고 습관화하기 전까지는 의지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며, 그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이 바로 환경 조성이다.

모임은 내향적인 사람에게도 그 의지를 높여 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내향적 사람에게 적합한 모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협동적 형태가 될 필요는 없다. 마치 도서관처럼 그저 한자리에 모여서 분위기만 조성해주면 된다. 이러한 말을 하면 "도서관을 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던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런 사람들도 옆에 공통의 목적이 있는 지인이 있으면, 조금 더 힘이 되고 노력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블로그를 만들면서 깨달은 바는 자신을 내세우고 그것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무엇인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보인다는 사실,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에도 끊임없이 나아갈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곧 도전이다. 그 도전은 타인의 평가, 시선에도 있지만, 나 자신의 시선이나 평가에도 있다. 글을 쓰고 그것은 서랍 깊숙이 넣어 둔다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평가에 앞서 자기 자신의 평가를 피하려고 하는 시도나 다를 바 없다.

나를 내세운다고 해서 모두가 비난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두려워만 했을까? 지나온 세월을 돌아볼 때,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을 겸양이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그 부끄러운 감정을 포장하면서 합리화해왔다. 거기에 나이를 먹어가며 자존심만 더 세져서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넘어서거나 그 영역을 확장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을 꾸준히 올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영화 〈아는 여자〉에 보면, 남자 주인공이 하는 말이 있다. 「난 오늘 남들에게는 다 있는데 나는 갖지 못한 세 가지를 알았다. 나는 첫사랑이 없고, 난 내년이 없고, 난 주사가 없다.」나 역시 갖지 못한 것이 많았다. 부끄러움으로 내 성과를 내세우지 못했고, 성과를 내세우지 못하자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없었고, 경제적 보상을 기대할 수 없자 사랑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남들은 있으나 나에게 없는 것 모두를 비단 나에 대한 소극적인 마음이나 부끄러움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우나 그럼에도 대체로는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을 빠져나와야 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5년 전에도, 어쩌면 10년 전에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발버둥 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몰랐거나, 그렇게 해도 살아갈 만했거나, 혹은 게을러서였다. 아니 어쩌면, 피우던 담배를 바라보며, 「담배를 끊어야지.」라고 다짐하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이 마음을 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 해결에는 적절치 않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킬 수 없는 의지를 내세워 일말의 마음의 위안을 얻기보다, 일단 부담이 적으면서 할 수 있는, 적은 일부터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구독자 수가 그리 많지 않지만, 분명히 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계로 깨닫게 하는 이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처럼, 의지와 관련한 작은 일부터 꾸준히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그게 다른 사람이 볼 때 고작 작은 일, 큰 포부도 아니고 작은 포부나 「고작……」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의지라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니었을는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큰 의지가 필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것들로 나누고 더 잘게 나누어 실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포부나 의지를 말하지 않더라도 실현이 되어 있지 않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언제나 훈련이 되지 않으면 쉽게 지키긴 어려운 일이긴 한다.

시간이라는 물살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죽음이라는 목적지까지 우리를 안내해준다. 그러나 그 물살에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물살에 끌려다닌다고 잘 살지 못한다는 말도 아니고 물살을 거스르거나 여러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잘 사는 것도 아니다. 글을 지금까지 읽었다면 알겠지만, 잘 사는 게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이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와 같은 삶이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물살을 거스르는 것이 내 의지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다만, 물살을 거스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며, 힘이 들며,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의지이고 그 의지를 고취할만한 커다란 의미가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도 위대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수많은 사람이 계란을 던진다면 바위가 언젠가는 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계발서를 즐겨 보지는 않지만,「거절당하기 연습」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100번을 거절당하니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라고 표지에 쓰여 있는 구절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그때 당시에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르던 상황이었다. 나이는 먹어가고 친구들은 가정을 이루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게 지내는데, 정작 나 자신은 작가가 된다고 다짐했으면서도 그에 따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뭔가 점점 스스로 위축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되겠다고 여기던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지막 단계, 나를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그 단계에 가면 나를 내세우지를 못했다. 무엇보다 거절당하거나 비판받기를 두려워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친구들은 일단은 사람들 앞에 보이고 나서 피드백을 받아 가면서 고쳐나가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본 책이 바로 「거절당하기 연습」이었다. 책의 내용은 표지 제목에서 함축하는 바를 자신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정도이지만, 그래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었다. 물론 나는 거절당하기를 연습까지는 하지 않고 있으니, 아직도 두렵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대중이 보는 공간에 꾸준히 올린다는 것은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니라고 여길 일이나 나로서는 큰 도전이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하나의 일이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내게는 커다란 일일 수 있다. 반대로 내게는 별것 아닌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커다란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큰 내적인 변화를 겪고 나서야 가능한 일들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이다. 물론 나무들로서는 자신의 의지로 나뭇잎 하나를 범죄자를 향해 떨어뜨린다는 행위는 엄청난 행위이겠지만, 사실 인간으로서는 '낙엽 하나가 떨어진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라고 여길 수 있다. 어떤 행위에 대한 누군가의 '시도'는 그래서 인류가 달에 남긴 최초의 발자국처럼 여겨야 한다. 그것이 어려움이나 두려움을 극복하고 행하는 최초의 시도라면 그것은 단순한 발자국이 아니라 자신의 거대한 도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시도를 볼 때마다, 아무리 사소하다고 하더라도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그 행위에 손뼉을 쳐준다.

사실 우리가 어떤 시도를 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주변에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기 더이상 없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대지를 딛고 우뚝 일어서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칭찬이라는 피드백을 부모로부터 받는가? 그러한 애정을 담은 피드백을 사회에서 경험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혼자서 힘들게 일어나 주변을 보아도 자신에게 잘했다고 말해주는 이 하나 없으니 그 대단한 시도를 스스로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하거나 혹은 퇴행하거나 그다음 단계의 시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네 다리로 걷다가, 두 다리로 일어서고 다시 아장아장 걷기를 반복하며 끝내 달리기까지 시도하는 단계별 도전이 좌절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시도가 두려울 수 있지만, 누군가가 비난보다는 진심으로 잘했다고 말해주는 그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며 그 용기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이 사회에서 칭찬 혹은 긍정적인 피드백에 인색했던 것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을 타인에게 해줘라」라는 황금률은 따르지는 않고 그러한 연습 또한 하지 않으니 나 자신의 시도나 노력을 인색하게 바라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사실,「거절당하기 연습」이 거절을 반복함으로써 거절이라는 고통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엉뚱한 제안에도 거절하지 않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여 자기 마음의 장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칭찬하기 연습, 혹은 긍정적인 피드백 주기 연습」 역시 추구하는 바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진짜 내게 필요한 것, 찾아야 하는 것은 시도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그 행위를 거절당하기 연습을 통해서 발견하든 혹은 누군가를 계속 칭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호혜적인 칭찬을 얻게 되든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마음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그러한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은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거절당하기 연습은 두려움을 딪고 새롭게 시도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고 어떤 시도부터 하는 게 좋을까? 일단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시도를 세분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가 가진 콤플렉스를 제거하는 방향으로의 시도가 더 필요하다. 가령, 경제적인 어려움은 언제나 나 자신의 마음을 위축하는 요인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안정시킬 시도가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어 모임의 참가비를 올리거나 혹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인 과외를 알아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운동 프로그램도 비용을 올려서 다시 진행해볼까 싶기도 하다. 이에 앞서 규칙적인 생활을 위하여 모집하였던 아침 기상 모임 프로젝트를 다시 시도해봐야겠다. 아침 기상 모임을 시도하면 피곤하기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게 많았다. 아침 시간을 넉넉히 확보홤에 따라 아침에 차분한 마음으로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시간도 늘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계획서를 서로 작성했더니 실제로 적어둔 일들 대부분에 성과를 얻은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할 수도 있는 일」 이렇게 범주를 나누면, 경제적인 어려움에 따라 시도해야 할 일들은 그보다 더 큰 범주인 「해야만 하는 일」의 범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거나 여자 친구를 사귀는 일은 「하고 싶은 일」에 집어넣으면 될 일이다. 여하튼 하반기에 시도할 일들을 작성하고 실제로 시도를 해봐야겠다. 두렵지만,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우직하게 배고프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피터팬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시도를 어려워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가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연애였다. 현실적인 연애는 돈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데 돈이 뭐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연애를 매일 집에서만 할 것도 아니거니와 설령 집에 365일 함께 있겠다고 하더라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사실 돈을 포기한 지 오래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돈을 번다는 것은 나의 시간을 팔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것과 같은데, 지금의 나는 나 자신에게 투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소한의 시간을 두어 간신히 집세를 내고 책을 사고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아르바이트만 했을 뿐이다. 이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나이임에도 대학생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애는 것은 사치였다. 그러나 문제는 좋은 인연이 언제나 원할 때, 여유가 있을 때 오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따금, 갑자기 찾아온 인연이 있어도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시도를 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돈을 벌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물론 속으로는 '돈이 뭐가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라고 말해도 그녀 앞에 서면 언제나 나의 자신감을 꺾어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 버린 내 나이 역시 그러한 관계를 시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었다.

나는 지금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 어떤 시도조차 스스로 하지 않을 이유를 미리 만들어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진정 경제 상태를 안정화하는 것이 어쩌면 현재로서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도 있는 일」의 시도를 가능케 하는 제1의 실제 해법일지도 모른다.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경제 활동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을까? 나를 한정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이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적인 인연은 함께 미래를 그려나갈 사람이다. 이러한 미래에는 돈이 있어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상이 존재한다. 결혼하고 집을 구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 모든 것이 그렇다. 지금의 돈이 아니라 미래의 돈이기는 하나, 사람은 언제나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를 가늠한다. 내 경제생활의 현재는 엉망이며, 그 미래 또한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랑을 한번 해봤으면 싶다. 내 얼어붙은 심장에 온기를 부어줄 사랑이 다가와 행복감에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가치 있는 시간을 고용주에게 양도하여 돈으로 모조리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 점은 고려하면, 소위 워라밸을 고려해야 할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어떤 식으로 바라봐야하는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돈을 어떻게 생각하는 게 옳을까? 돈은 책과 같다. 책은 그 자체로도 가치를 지니지만, 내가 읽고서 삶의 의미와 통찰을 위한 도구로써 활용할 때 비로소 제 기능을 다 한다. 그 책 자체를 모두 소유하려는 욕망은 그럴 수도 없거니와 「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리히 프롬이 한 말처럼, 그저 과자를 씹듯 먹어 버리는 행위이다. 돈도 그렇다. 돈 역시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지만, 그것을 삶을 위한 도구로서 가치 있게 활용할 때, 참다운 가치가 있다. 세상의 모든 돈을 다 소유할 수도 없거니와 천박하게 사용하면, 그 자신도 천박해진다. 물론 돈 자체가 천박한 것은 아니므로 멀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그것만을 생각하고 가까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라면 족하다. 돈이 넉넉하게 있어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꾸준히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돈을 벌어들이다가 결국 하고 싶은 것들을 위한 시간 전부를 돈을 버는 데 할애하게 된다. 아니, 내 의지로 할애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고용 상태에 있는 경우라면, 그것마저 내 의지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어려운 까닭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다. 노동자가 시간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내 의지대로 일과 삶의 균형을 고려하여 시간을 딱 떼어낼 수 없다.

과거에 내가 원하던 것들은 대체로 돈을 많이 들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책을 읽는데,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고 운동을 하는 데에도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 음악이나 미술을 하는 데에도 취미 생활 정도라면 그리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만나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삶이 문제이다. 함께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한 수많은 암묵적인 지침 속에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돈의 참다운 가치 따위는 상관하지 않더라도 돈이 없다면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란 힘들다.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것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라고. 나는 어쩌면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기에 돈이 많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좀 더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과연 이게 돈에 관한 철학 내지는 본질일까? 여기 작은 욕망에 만족하며 두려움 없이 살던 한 인간이 이제 미래에 두려움을 느끼며, 동시에 더 큰 욕망을 바라고 있었다. 실로, 돈에 대한 욕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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