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반 고흐의 방(La Chambre de van Gogh a Arles '1889)
※ 작가적 삶을 위한 공간으로서 내 방을 어떻게 두어야 할 것인가….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새벽 1시 30분에서 2시 사이 취침, 아침 6시 45분 기상, 매일 약 5시간 정도 취침을 해서 그런지 주말만 되면 늦잠을 잔다. 근래에는 보통 10시에 일어나는 듯한데, 그때까지 자겠다고 마음을 먹고서 자는 게 아니라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전날 잠들고 일어난다. 이렇다 보니 토요일 아침 시간을 활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뭔가를 딱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도 않아, 그냥 10시 전후로 일어나 침대에서 멍을 때리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잠을 더 자거나 할 뿐이다. 이를테면 주말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생각할 뿐이다.
아침에 의도치 않게 늦게 일어나면 불쾌함이 높아진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중한 시간을 그냥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어제 아침도 그러했다. 그 시간을 뭉그적거리다가 주말 오전의 날들을 거의 다 흘려버리다가 오후 시험 감독과 저녁의 약속을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에 구매한 선풍기 덕택으로 짜증스러움은 없었다.
늦게까지 잘 수 있다는 것이 주말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일까? 혹은 내가 이렇게 기분이 나쁜 까닭은 특별한 날에 늦게 잠들어서일까? 아마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특별한 날답지 않게 의미 없이 흘려버려서일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평일처럼 다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평범한 날에는 일찍이라도 일어나 글을 쓰면서 어제 맞이했던 새로운 날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날이 특별한 날이 되고 특별한 날이 평범한 날이 되는 것은 그날 자체가 어떤 날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날을 어떻게 보내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었다. 나는 주말 아침의 특별함을 위하여 조금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샤워하고 오래간만에 빨래한 셔츠를 다렸다. 쭈글쭈글해진 옷을 입고 시험 감독에 갈 수는 없었다. 셔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니 몸이 제법 멋있어 보였다. 오래간만에 운동한 태가 나는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시간을 보니 시험장까지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점심은 걸러야 할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대량 구매한 초코파이 2개를 대충 챙겨 밖으로 향했다. 하늘은 맑았지만, 생각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꽁꽁 닫아놓았던 방 안에서는 씻고 나와도 땀이 흘렀는데, 밖은 그보다 훨씬 시원했다. 요즘에는 미세먼지도 없어서 탁 트인 시야에 얼굴과 소매를 접어 올린 팔에 스치는 간들간들한 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그 덕에 짜증스러웠던 아침의 감정은 어느덧 가라앉고 말았다. 필시 집안의 공기 탓이었을 것이다. 방안의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눌렀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길을 걸었다.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생각하니 어린 시절 본 어떤 소설이 생각났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심지어 소설인지 수필인지조차 모르고 그저 이야기의 줄거리만 기억할 뿐이다. 아마 전쟁 이후 가난한 시기를 보낸 어떤 작가의 유년 시절, 어머니를 추억하는 글이었던 것 같다. 저자는 '어머니는 쥐만 나타나면 부지깽이로 어떻게든 그 쥐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었다.'라며 그녀를 추억했다.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쥐를 향해 분노의 감정을 퍼붓던 어머니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지금도 인상적이었고 그렇게까지 어머니가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쥐에게 쏟아내는 것에 대한 의아함도 느껴지는 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온화한 어머니가 쥐에게 퍼붓던 그 분노의 감정은 실제로는 가난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아니었나 싶다.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망령과도 같은 쥐는 어머니에게는 실체화된 가난이었다. 언제나 온화한 감정과 이성을 유지하려던 자신은 그 실체화된, 자신과 다른 생명체인 쥐 앞에서 무너지고 반드시 잡아야만 한다며 눈에 불을 켜고 부지깽이를 들었던 것이다.
쥐가 실체화된 가난의 다른 이름이라는 데에서 생각이 이어진 것 같은데, 문득 나의 방에 있는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과 널브러진 옷가지, 그리고 이들이 좁은 방 안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는 앞에서 말한 소설의 어머니처럼, 어쩌면 실체화된 내 마음의 반영일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치워야 하는데…'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쉽게 그것을 건들지 못하는 까닭도 은연중에 그 말도 안 되는 이유 탓으로 두고 있던 것 같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부지깽이를 들듯, 그러한 옷가지와 쓰레기에 분노하고 혐오하여 어떻게든 치워버리려고 하면 좋을 텐데,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자포자기했다.
예전에 「안녕하세요?」라는 티비 프로그램에서 청결에 미쳐 사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청소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가족들이 너무 피곤함을 느껴 방송에 의뢰한 것이었다. 그때, 그녀가 청소에 집착하는 것은 정말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었다. 청결에 따른 청소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진짜는 오랜 기간 취업 준비를 하던 그녀의 심리적인 문제가 더 컸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청소한다는 것은 그녀의 공허하고 불안한 마음의 반영이었던 것처럼 나 역시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냥 청소하면 될 것을 청소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청소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혹은 그 방에 존재하는 분위기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마음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고 싶을 뿐이다. 이처럼 내가 사는, 작은 이 공간이 엉망이 되는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엉망이 되는 현상들이 있을 때 그 집단 구성원의 공통된 심리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의 축소판과도 같다.
버스에 올라타니 상구가 멀리서 내게 인사를 했다. 이 친구도 취업을 준비한다고 고생을 했는데, 아직 붙은 곳이 없다고 했다. 상윤이를 생각하며, 시간이 문제이지 계속 노력하면 잘될 거라고 말했지만 전혀 위로되지 않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의미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도 먹을 것을 사주는 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점심 약속을 잡았다.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천주교 세례를 위한 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다. 취업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함일까? 혹은 다른 이유에서 세례를 받는 것일까? 아마 이제야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일 텐데, 그가 신자가 되기로 한 까닭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내 아버지는 기독교 신자였다. 그가 신자가 된 것은 어릴 때부터였지만, 진짜 성실하게 교회를 다니게 된 시점은 아마도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집에 큰 불이 나고 그 이후부터였다. 고모네 집에서 다니며 학교에 다니던 내가, 집이 전소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서 듣고 부모를 보러 시골에 왔을 때,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작은 컨테이너에서 적십자에서 구호 물품으로 준 소매가 짧은 체육복을 입은 채로 손을 뻗어 나를 반겨주셨었다. 그런 의연한 모습에 오히려 위로하러 온 상대방이 당혹스러움을 느낄 정도였지만, 분명 아버지는 그때 우리가 걱정할까봐 그런 모습을 보였을 뿐, 심적으로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그 계기 가운데에는 주변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도 있었을 것이었다.
시험장에 도착해서 들어가니, 본부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이미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배정받은 본부장을 보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주 가끔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직감적으로 싫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느낌이 들 때 그런 방향으로 흐르는 자신의 감정이 불편하여, 그 까닭에 대한 이유를 찾게 되곤 했다. 이 사람의 경우 '지나치게 호들갑스러워 감독관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가 다행히 찾은 이유인 듯한데, 그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 조금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말투나 얼굴 때문인가?' 이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 여하튼 이럴 때는 아마 제 육(六)감이 내리는 신호일 거로 생각하고 좋거나 싫은 감정을 내색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기 일만 잘하는 게 상책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조용히 복도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써 내려갔다. 교실 안에서는 시험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고 한쪽 귀로는 그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쓰던 와중에 동생과 필리핀에 여행 간 수정 씨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작년 초에 영어 모임으로부터 알게 된 그녀는 작년 이맘때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 갔다가 얼마 전에 다시 한국에 들어와 다시 동생과 함께 필리핀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영어 모임을 하고서 인연이 계속 유지되어 계속 연락하고 있는 사람은 전체 인원 중에 몇 명이 안 된다. 그중에서도 이성은 한 명뿐인데, 그게 바로 수정 씨였다. 모임에서 이 친구에 대해 좋은 기억이 많았는데, 그중에 제일 기억이 나는 것은 서로 영어로 대화하다가 어떤 조언을 그녀에게 해준 일이었었다. "많이 힘들지? 넌 잘하고 있어. 내가 늘 응원할게."와 같은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이 말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런 보석 같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여자의 눈물은 무기였다. 나는 그 무기 앞에서 모든 마음의 무장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메마른 땅에 단비와도 같은 그녀가 모임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모임을 계속할 의미가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 덕분에 그녀와 함께하면서 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힘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싶었다. 물론 이런 호감을 내비치지도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녀 역시 유학 간 남자 친구가 있을뿐더러 내 마음을 내비치기에는 나이 차이도 꽤 나는 편이었다. 그저 그녀가 무엇이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고 도와주는 것이 좋았고 그로 인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몇 개월 후에 그녀는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고 이야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 떠났다. 그래도 그녀는 간간이 내게 연락을 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녀는 카톡으로 자신이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잠시 설레는 기분을 느꼈으나 바로 마음을 부여잡았다. 나는 나 자신이 그녀가 내게 관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다는 착각을 하고 싶지 않았고, 이런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꽃 같은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라도 보고 그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적어도 연애에 관해서는 나는 돈이 없으며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없었다. 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마치 공수래공수거처럼 여기며 자신의 부족함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내 호감은 언제나 고백이나 거절로 끝맺지 못하고 저 방의 상태처럼 그냥 그 상태로 놓여 있었다. 나는 이게 가장 안 좋은 내 성격이며 모든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외국에서 1년간 지내면서 너무 외로웠다고 했다. 말할 사람도 없고 같이 지내는 사람들도 매번 같은 외국인들이라 많이 외로웠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거기서 1년을 버티느라 고생했어요. 어찌 보면 한창 즐겁게 지낼 나이인데,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더니, 딱 그곳에 가서 고생했네요."라며, 상구에게 했던 말처럼 위로가 안 될 말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그리고 여행 중에 찍었던 여러 사진을 내게 보내왔다. 가기 전에는 교정기를 꽂고 있었는데, 사진에서는 모두 교정기를 빼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며 사진에서 무엇을 놓친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몇 번이나 뚫어지게 보았다.
시험이 끝나고 나와 보람이와 기정의 약속 장소였던 강남으로 향했다. 몇 번의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착하니 약속 시각보다 1시간가량 일찍 도착했다. 커피숍을 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 같아서 근처 서점에 들어갔다. 상당히 큰 서점 안에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마련된 테이블들과 의자들이 곳곳에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책을 들고 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는 게 인상적이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 한쪽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계속 글을 썼다. 오후에 완성하고자 했던 글은 수정 씨와의 대화 때문에 쓸 수가 없었고 지하철에서도 사람들이 많아서 쓰기가 어려워, 이제야 마음을 좀 가다듬고 쓸 수 있었다. 되도록 친구들이 약속 시각에 맞춰서 오거나 더 늦게 왔으면 싶었다. 글을 쓰는 것이 가장 특별한 것이 된 지금, 주말은 그것을 다른 날보다 더 어렵게 만들었다.
평범한 일상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고 특별한 날에는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친구와 연락을 취하고,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이 내 생각을 즉각적으로 생산해줄 수는 없었다. 특별한 일을 접하고서 그에 대하여 곱씹을 시간을 가질 때 비로소 특별한 의미가 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고서 그 사람이 해준 일들이 더욱더 기억나는 까닭 역시 충분히 곱씹을 시간이 있어서였다.
한 40여 분이 지나자 기정으로부터 근처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아까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올 때는, 갑자기 내린 비로 우왕좌왕하며 건물로 뛰어들었는데, 이내 비가 그치고 하늘은 군데군데 먹구름만 있을 뿐이었다. 밖에 나와 잠시 기다렸더니 맞은편 건널목으로 기정이 손을 흔들며 건너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기다리니 약속 시각에 딱 맞춰 보람이가 지하철 계단 쪽에서 올라왔다.
우리는 요즘에 유명하다던 꼬막 비빔밥집으로 갔다. 밥을 먹으며 그간의 근황이나 환불 업체와 관련된 일, 그 일을 겪고 나서 집안의 문제를 부모님께 들었던 이야기, 그동안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동생에 대한 애틋한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모두 내 동생이 대단하다며 칭찬을 했다. 밥을 먹고서 2차로는 커피숍에 갔는데, 보람이가 근처에 요즘 인터넷에서 유명하다던 커피숍으로 안내를 했다. 2층과 3층에 있는 그 커피숍은 기존의 휘황찬란한 실내장식이 있거나 밖에서 보면 커피숍이라고 일컬을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커피숍을 바로 근처에 두고서도 찾지 못하고 잠깐 그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19세기 고종 황제에게 처음으로 커피가 진상되었을 때 쓰였던 이름이라던 '가배'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그 커피숍은 분위기마저 강점기 시대의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특히 창문의 틀이 그러했는데, 누가 봐도 그 시대 목조 건물에 쓰일법한 창의 느낌을 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테이블 역시 일반적인 커피숍의 현대식 테이블이라기보다는 1980년대 6인 가정 식탁으로 쓰일법한 널따란 목조 테이블 등이 곳곳에 있었다. 커피가 처음 보급된 19세기 조선의 근대식 가옥이라는 측면에서 독특함은 있었지만, 그때의 콘셉트를 살리고자 했다면 커피를 주는 잔 역시 밑받침이 있는 느낌 있는 잔으로 주었어야 옳다고 생각했다. 잔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유리잔이었고 커피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분위기를 경성의 찻집 콘셉트로 가져간 것은 나쁘지 않으나 그것뿐이었다. 좌측에는 스타벅스 리저브에서와 같은 긴 테이블이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비치되어 있었는데, 우리가 온 저녁때에는 그런 테이블 말고 아무것도 없어서 여기서 드립 커피를 내려서 판매하는 것인지 그저 장식으로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창문과 은은한 빛 그리고 곳곳에 비치된 얇은 대나무에서 커피가 '가배'로 존재했던 시기로의 아득한 느낌을 잠시 맛볼 뿐이었다. 그래도 그뿐이라고 하더라도, 번화가인 서울 도시 한 복판에 이러한 독특한 19세기 말의 콘셉트의 커피숍이 남몰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제대로 된 간판 하나 없음에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와서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점에서 공간을 차지하는 시각적인 즐거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내 방이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되려면 그 느낌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옥상에 있는 술집이었다. 하늘이 뻥 뚫린 옥상에 만들어 놓은 술집은 마치 서양 어느 바닷가에 있는 술집의 느낌마저 들었다. 높은 빌딩의 꼭대기 층이라 밖에는 도시가 보였으며 하늘은 열려 있었다. 약간은 쌀쌀한 바람마저도 바닷가의 바람을 닮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황색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 또한 그런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듯했다. 도심 위에 있는 이러한 공간을 보면서 나는 지난여름, 대용과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가 2층의 민박집을 빌려 이렇게 꾸며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옥상에 크리스마스 때나 사용할 법한 작은 등이 연이어 있는 줄을 사서 2층의 넓은 발코니 주변에 걸어두고 음악과 프로젝터를 함께 틀어 놨었다. 은은한 분위기에서 마시는 술과 음식이 알딸딸해질 무렵 감미로운 음악과 영상이 스피커와 프로젝터를 통해 나오고 우리는 지금처럼 홍조를 띤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멀리서는 바닷소리가 틀렸고 간간이 밖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대용은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다 해 왔다.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면 어디서든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이 가득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몸만 오면 된다고 했고 나는 지금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생각해보면 그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던 좋은 추억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비록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여행의 추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 했고 그 수혜는 나에게도 돌아갔다. 언제나 그러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마치 '굿 윌 헌팅'의 벤 에플랙처럼 나를 데리러 왔고 특별한 장소로 데려갔고 특별한 경험을 시켜주었다. 자기의 손해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고 언젠가는 내가 잘될 것을 계속 지지해주었다. 봄에는 가장 봄다운 곳에 데려가서 봄 내음을 코끝으로 느끼게 하고 여름에는 가장 여름다운 곳으로 데려가 온몸으로 여름의 시원함을 느끼게 했다. 가을에는 가을 풍경의 알록달록함을 눈으로 담아주고 겨울에는 귓불에 스치는 매서운 바람을 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그런 사계절 내내 그런 행복을 알려준 친구였다. 나는 진심으로 행운아였다.
이 루프톱은 과거의 좋았던 추억으로 나를 잠시 인도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미래의 어느 곳에 있을 때, 지금, 이 순간 기억이 다시금 떠오를 것이다. 바람이 선선하고 저 등이 비치는 어느 바닷가에서 나는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하던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