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침묵」과 기독교

나의 일상 여행기. (13)

by Chris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이름이나 세세한 사항은 실제 인물과 다릅니다.




일어나서 조금 빈둥대고 씻고, 식단 관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믹서기로 갈아 들이키고 나니 9시이다. 어떻게 예전에는 5시 기상 프로젝트를 하고 7시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아침이라는 고요한 이 시간은 일찍 잔다고 해서 그 피곤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죽음에서 부활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 관성, 침대라는 관에서 꼼짝달싹 없이 있다가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기 때문에 신체가 활성화되려면 부팅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부팅시간을 줄이려면 아무래도 운동과 같은 활동적인 무언가를 아침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정적인 것이 아닌 동적인 활동을 통해 신체에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미세먼지만 없다면 예전처럼 아침 운동모임을 모집하고 싶은데, 이놈의 미세먼지에 대한 걱정이 발목을 잡는다. 생각해보면 미세먼지 수치가 예전보다 좋아지긴 해서, 지금 날씨 정도면 아침 운동모임을 다시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듯싶기도 하다. 기존 장비를 미리 점검해두고 모임 모집을 고려해 봐야겠다. 생각을 바꿔서 대학생이 아니라 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하면 어떨까? 홍보가 좀 더 어려울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해할만한 수준의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으니 동기 부여가 되어 좀 더 심도 있게 근육운동을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의 스터디룸의 예약이 다 차서 간만에 도서관에서 영어 모임을 진행했다. 모임을 하면서 영어 실력의 부족함을 더욱 느낀다. 미드를 편하게 보려면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까? 말하기와 청취에 관해서는 목표를 미드에 둬야겠다. 하루 영어에 들이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모임 2시간, 자료 제작 및 기타 시간 약 1시간, 아르바이트를 오며 가며 길 위에서 2시간, 총 5시간가량이다. 이것도 어영부영하지 않았을 때 걸리는 시간이다. 이만큼의 시간을 투자하는 게 옳은 것인가? 잘 모르겠으나 기왕 이 시간을 투자하기로 한 거, 정말 잘하고 싶다. "이 사람은 진짜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현재 목표에 각각 들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영어 5시간, 독서도 5시간 정도? 운동은 이틀에 1시간, 아르바이트 1시간, 글쓰기는 독서와 병행하고 있고 걷기 운동은 아르바이트 가는 길 위에서 영어와 병행 중이다. 요즘에는 삶을 기록하는 데에도 2시간가량 쏟는다. 이렇다 보니 무언가를 좀 더 하려면 아침 시간 확보나 저녁 자기 전 시간의 확보가 필수이다. 좀 더 시간을 짜임새 있게 활용하자. 그리고 주변에 나의 실력 향상을 위하여 도움을 줄 이들을 찾자. 꼭 대학 내에 국한되지 말자. 너 자신의 현재 상황을 직시하라! 꾸준히! 그리고 복습 철저! 특히 영어는 지난 3개월 치 정도는 즉흥적으로 나올 정도로 연습하자!

모임이 끝나고 어제와 같이 닭가슴살을 비롯한 각종 과일과 야채를 섞은 셰이크를 만들어 점심을 때우고 500원을 들고 코인 노래방을 갔다. 점심 이후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까닭이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집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탈출할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인터넷을 하는 것보다 비교적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다. 그 까닭은 노래도 연습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생산적인 것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요구하는 것인가 싶다. 즐길 수 있는 연습이 바로 공자님께서 이야기한 ‘좋아하는 것을 넘어 즐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연습을 연습같이 느끼지 않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만들어야 한다.

두 곡 부르고 ‘월천라운지’로 와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보았다. ‘침묵’을 보고 일본 문학에서 느껴지는 그로테스크함이 사라졌다고 말했는데, 다시 수정해야겠다.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그로테스크함은 많지 않으나 일본인의 문화, 특히 책에 등장하는 고문은 인간의 잔인함을 극대화했다. 혹시라도 조선시대에도 책에서 나오는 이런 잔인한 고문이 존재했는데 일본에 대한 편견으로 일본 문화의 특성과 결부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여 검색해봤으나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고문은 세 가지뿐이고 그마저도 두 가지는 왕명에 의해서만 가능한 고문이었다. 즉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주리를 틀어라!"가 보편적인 고문 방법이었으나 이마저도 후기 조선에서는 양반들이 부모께 절을 하지 못한다 하여 폐지되었다. 물론 법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비공식적으로도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제재할 만큼 고문에 대해선 비교적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은 천왕 외에도 영주가 지배하던 에도 시대에는 다양하고 잔인한 고문 방법들이 사용된 것 같다. 객관적으로 비교하려면 이런 고문이 법으로 인정되었는지를 찾아봐야 할 것이나, 지방 분권화된 당시 시대를 고려해보면 딱히 왕명으로 고문을 금지했을까 싶다.

이들이 정말 잔인하다고 느끼는 점은 당사자에게 고문을 가하는 게 아니라 당사자가 아끼는 자들에게 고문을 가한다는 점이다. 고문의 신음과 장면을 상대에게 보여주어 그들이 배신하거나 자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한 고문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이야기에서 한 번쯤 누구나 들어봤음직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촛불 집회 속에서 삼일 운동의 문화 유전자를 찾듯, 어쩌면 이들에게도 오래전부터 내려온 그러한 잔인성을 인정하는 문화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재밌는 것은 우리나라는 고문이나 신체를 유린하는 행위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이 다양한 것 같은데, 일본은 그 반대로 신체를 유린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됐지만, 욕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좋게 생각하면 우리에겐 신체발부 수지부모와 같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신체 훼손에 관한 공고한 도덕관념이 있어서일까?

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왜 일본에서 가톨릭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심지어 그곳에 있던 신부들조차 배교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아끼는 그리스도의 신도들을 위하여 신념을 깨고 성화에 발을 올리는 것을 보며 배신한 베드로나 유다 말고도 영화 곡성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곡성의 한 장면에서 천우희는 남자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는 그녀의 딸을 보러 가지 말라고 하지만 결국 보러 간다. 기독교의 베드로 배교 장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겠지만, 신부가 성도를 사랑해서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고 발을 올린 것처럼, 그도 자기의 딸을 그토록 사랑했기에 그 믿음을 저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영화를 볼 때는 천우희에 대한 믿음의 끊임없는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은 판단 실수 정도로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 침묵, 믿음에 대한 불확실성 이상으로 딸을 사랑하는 마음, 눈앞에 고통받는 사랑하는 자를 구해야만 한다는 아버지의 소망은 믿음마저 저버릴만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번민하는 존재이기에 그 끝이 불행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한다.

물론 침묵은 베드로와 유다의 배교에 대한 변명(?) 혹은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기에 유사점이 많으나 영화 곡성은 여러 모티프를 따왔을 뿐이며 그 주제 역시 배교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적 해석을 통해서만 곡성을 투영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다.

안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라는 책을 보고 이어서 ‘침묵’을 보는 것인데, 두 책 사이에는 그 주제가 상당 부분 통하는 점이 있다. '깊은 강'에서는 신부가 이름 모를, 자기 이익만 좇는 자를 구하려다 발이 밟혀 죽고 '침묵'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화가 발에 밟힌다. 그리고 밟은 자는 배교자가 된다. 이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큰 주제는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악인을 위하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뿐 아니라 유다 역시 용서하며 자신이 죄를 저지른 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유대인에게만 임재하는 신이 아니라 모두에게 임재하는 신이며 우리를 사랑하사 그들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는 분이다. 그들의 죄는 죽음 이후 심판하나 그것을 너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저 죄를 심판하는 것이다.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한 벌일 뿐이며 그러한 벌을 내릴 때도 그분은 가슴 아파할 것이다. 비록 슈사쿠는 가톨릭교도지만 프로테스탄트적 신, 그리고 범신론적 신을 (아직도 범신론적 시각이 강한) 일본인 특유의 시각으로 풀어내었다.

이 책은 이질적인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려는 외국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눈에 비치는 일본을, 일본인 가톨릭 작가가 쓴 책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도로서의 바라본 일본 비판과 현대 일본인으로서 일본 옹호가 공존한다. 그에게 일본은 그리스도가 사랑한 제자들인, 배교한 유다이며 베드로이다.

나는 그토록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날 외면하고 또 때로는 잘못을 저질러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또한, 나에게 그런 존재가 있을까?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식을 그토록 사랑하는 부모는 그가 잘못할 때 그것을 다그쳐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잘못에 벌을 내리는 까닭은 그것이 그를 바르게 자라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와 반대로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일본 권력자의 시각으로 보는 기독교가 잠깐 등장한다. 크게 다루진 않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사회의 관념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기존의 사회 문화를 부수는 문화침략자로 인식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나의 더럽혀진 발을 씻겨줄 이가 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더럽혀진 발을 씻겨줄 수 있는가?

얼마 전에 읽었던 '로버트 오언' 전기에서 저자 E.H 콜이 말한 ‘그리스도로 인하여 개개인 모두가 자유로우며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상기한다. 낮은 자들을 그토록 가장 사랑하신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결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님을 인식했을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와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내세, 천국의 자리를 약속함으로써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개선하기보다 체념토록 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진보 과정 중에 탄생한 기독교는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음은 틀림없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권력자들의 기독교를 만들고자 오신 게 아니라 낮은 자들을 위한 기독교가 되려고 오셨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엔도 슈사쿠가 전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은 더 크다. 그것은 선민의식도 아니고 형상으로 존재하며 허례허식의 기독교도 아니다. 우리 마음의 반석 위에 세운,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교회이다. 나는 이제 불가지론자이지만, 그가 주신 의미는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나는 그와 같이 되고 싶으며 그처럼 끊임없이 세상을 사랑할 것이다.

이전 12화글쓰기에 관한 생각 / 오언주의와 랭커스터 교육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