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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03. 2019

그는 왜 똑똑한데 4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힐빌리의 노래를 통해 본 반지성주의 소고.

왜 지성을 동경하면서도 반지성주의에 매료되는가?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호프스테터)와 힐빌리의 노래(J. D. 밴스)를 통해 본 반지성주의 소고.




정치를 떠나 TV에 나와 대중에게 사랑을 받은 한 정치 평론가이자, 작가가 있다. 매주 탁월한 정치 평론과 식견으로 정치 사회 분야의 다양한 현상들을 쉽게 설명해 주는 터라, 그의 인기는 나날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며 나오는 프로그램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인기가 증가할수록 정치에 몸담았던 시절의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그런 그도 정치하던 시절에는 몇 번이나 낙선을 거듭했었다. 물론 당시에도 그의 지성을 높이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논리정연한 말로 상대편 진영을 압도했고 그러한 영상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촌철살인의 언변에 감탄하면서도 "저 xx는 머리는 똑똑한데,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로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에게는 보수 정당과는 다른 정치색이 덧입혀져 있었기에 논변이 뛰어나다고 한 들, 일부 대중의 관념 속에서는 이미 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투표 심리는 그 요인이 다양하여 딱 잘라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날카로운 이성이 경합해야 하는 정치 토론을 본 사람들 가운데에서 「왜 ‘싸가지 없음’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다. 다시 말하면, 대중이 지식인들에게 가지는 일종의 경멸이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수는 있다.


우리는 지성을 동경하면서도 때로는 반지성주의적 모습을 보이는가?

이러한 경향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왜 누군가는 통찰력을 가지고 신랄한 말을 하는 이를 때로는 경계하며 미워하기까지 할까? 혹자는 그들이 다수 대중과는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지적 허세가 심하다는 말로 그의 지성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말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치관을 포함한 대중의 보편적 가치관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에 대한 반감, 또는 그러한 생각을 펼치는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뛰어난 지성이나 학식을 갖춘 이들을 샌님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말을 선비질이라며 얕잡아 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어떤 적극적인 행동이 보이지 않는 이론에 가까운 말들만을 늘어놓는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단어에는 우리 사회가 가지는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저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는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경향에는 공통된 태도나 감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1」이다.

지성(intellectual)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혹자는 감정이라고 말하거나 경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완벽하게 반대라고 할 수 있는 말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지성의 반대말을 상상해보면서 반지성(anti-intellectual)의 성격이 무엇인지 조금 더 가늠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반지성은 인간의 이성을 폄하하고 감정을 중시하며, 지식을 무가치하게 보고 경험을 가치있게 여기는 행위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기업가와 노동조합의 지도자는 지식인 계급에 대해 놀라울 만치 비슷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2」라는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수많은 노동자가 왜 기업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을 지지하거나 보수층으로 결집하는 지에 대하여 지역감정이나 정당의 대북 안보관 이외에도 반지성주의와 연관된 다른 관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보수 정당에도 엄연히 지식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지식인의 현대적 관념이 – 나아가 지식인이라는 말 자체마저 – 정치적 · 도덕적 저항이라는 관념과 동일시3」된다면, 혹은 비판적 정신으로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를 갖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지식인이라면, 아무래도 보수 정당보다도 진보 정당이 지식인의 소임을 더 많이 행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사회 · 저항적 진보 사상을 가진 정치인들이 경험과 직관을 중시하는 기업가와 노동자들에게 지식인의 이미지가 똑똑한 척, 우월한 척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성을 가진 지식인들에 대하여 우리는 양가감정을 갖는다. 즉 「어떤 사안을 파악하고 처리하고 정리하고 조절하는」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하여 높은 존경을 표하면서도 「음미하고 숙고하고 의문시하고 이론화하고 비판하고 상상」하는 그들의 지성은 때로는 「칭찬을 받지만, 종종 증오나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4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계를 떠나 이제는 작가이자 정치 평론가로서 활동하는 그에게 던지던, ‘똑똑하다.’라는 말은 그의 지식에 대한 경탄이었고 ‘싸가지 없음’은 보수적 가치와 이념에 대항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을까 싶다.


반지성주의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왜 지식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도 반지성주의는 계속되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사상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적의를 품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그 반대인 대개 「사상에 깊이 몰두한 사람이거나 종종 케케묵거나 배척당한 이런저런 사상에 강박적으로 빠져드는 이들이라며,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고, 일편단심으로 지적 열정에 사로잡힌 적 없는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자신이 아는 반지성주의의 대변인들을 열거하면서 이들이 읽고 쓸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도하며 스스로 주목하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고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아는 반지성주의 지도자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매우 지적이고 일부는 학식도 풍부한 복음주의 목사들, 신학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근본주의자들, 상황 판단이 무척 빠른 이들을 비롯한 정치인들, 사업가나 그 밖에 미국 문화의 실용적인 요구를 대변하는 사람들, 강한 지적 자부심과 확신을 지닌 우파 편집인들, 다양한 주변적 작가들(비트족Beatnik의 반지성주의를 보라), 지식인 사회의 다수 집단이 지난날 표방한 이단 사상에 격분하는 반공反共석학들, 그리고 지식인들을 활용할 수 있을 때는 한껏 써먹었지만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극도로 경멸하는 공산주의 지도자들 등이다. 이 사람들의 기질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적대감은 갖가지 사상 자체, 심지어 지식인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반지성주의의 대변인들은 거의 언제나 어떤 사상에 헌신하며, 살아 있는 동시대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식인들을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오래전에 죽은 일부 지식인들 – 애덤 스미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장 칼뱅,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조차 – 추종하기도 한다.5」


프랑크 디쾨터의 『문화 대혁명』이라는 책에서는 중국인이 존경해 마지 않는 마오쩌둥이 반지성주의의 지도자로서 지성과 지식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군사적 모델을 향한 열정은 정식 교육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린뱌오의 표어는 〈정치가 최우선〉이었다. 내내 지식인을 헐뜯어 왔던 마오쩌둥은 이제 교육제도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3년 2월 13일 온 국민이 중국 설날을 기념하는 춘절 행사에서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험을 팔고문에 비유했다. 팔고문이란 청나라 때 과거에 응시한 지원자들이 논증을 펼치기 위해 익혀야 했던 문체였다. 〈나는 이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문제를 사전에 공개하고 학생들에게 관련 내용을 공부하게 한 다음 책을 참고해서 답을 적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더욱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했는데 커닝에도 장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답을 적고 내가 그 답을 베낀다면 내가 쓴 답도 옳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교사가 지루한 강의 내용을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 조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허튼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낫다.〉
마오쩌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교육 제도가 자본가나 지주 등 출신 계급이 불량한 학생들에게 유리하다고 비난했다. 이들 학생들이 프롤레타리아나 소작농 출신의 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서 보다 나은 교육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다른 무엇보다 <혁명의 계승자>를 길러 내야 함에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는 것이 특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 학생들은 곧장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침식 작용으로 생긴 구릉이 푸른 초원 여기저기에 불쑥불쑥 솟아 있는 광시 성의 아름다운 도시 구이린에 살던 아직 어린 소년 화린산도 마오쩌둥의 춘절 연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구구절절이 보석 같은 말씀이었다.〉 다른 많은 학생처럼 그는 교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생각이 필요 없는 이론 교육, 암기에 의한 학습 등을 중시하는 억압적인 교육 제도에 짓밟힌 기분이 들었다. 또 다른 미래의 홍위병 말처럼 〈수업은 내 시간을 낭비했고 사람들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석이 불러 줄 때를 기다렸다.6」


이와 비슷한 내용은 호프스태터의 책에서도 한 정치가의 말을 통해 등장한다.7


「이러한 사상은 지식의 가치보다도 경험의 가치를 더욱 중시하며 현행 교육 제도하의 배움을 허튼 지식으로 여긴다. 물론 이들 역시 지성의 가치를 무조건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에 강박적으로 빠져드는 이들은 마치 나무 위에 걸려 있는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처럼, 그 자체를 아무 쓸모 짝에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지식의 대척점에 경험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
개혁가와 정치인의 대립은 직업 정치인들의 마음 속에 정치 세계에서 활동하는 교육 받은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놓았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고정관념을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태머니홀Tammany Hall(원래 혁명전쟁 참전군인들이 1789년에 만든 공화파의 정치 기구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이민자들에 대한 일자리 알선 등을 무기로 뉴욕 시와 뉴욕 주를 장악하고 보스 정치를 일삼는 거점이 되었다.)의 저지 워싱턴 플렁킷George Washington Plunkitt에 의한 기록이다(다소 윤색되었을 테지만). 그는 세기 전환기에 대한 보고자이며 솔직한 시정市政 실무자였다. 만약 태머니파 지도자들이 “모두 책벌레에 대학교수였다면 태머니파는 선거에서 4천 년에 한 번밖에 승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단언한 플렁킷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는 민중, 즉 평범한 미국 시민이며, 중간 이름을 가진(전통적으로 중간 이름은 귀족이나 상류층이 많이 썼다) 거드름쟁이들을 누르는 데 필요한 만큼의 교육은 받았습니다. ······ 이 지역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친근감을 느낍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굳이 말을 가려서 쓸 마음이 안 듭니다. 헌법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전기는 몇 볼트인지도 입에 올리지 않고요. 어쨌든 내가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또 이런 말도 했다.
“정치에서 성공하는 법을 책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온갖 허튼 지식을 머릿속에 가득 집어넣지요. 이보다 더 심한 착각은 없습니다. 다만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대학이라면 뭐든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책벌레들이 있는 한 대학은 계속 존재할 테고, 어느 면에서는 쓸모도 있겠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도움이 안 됩니다. 사실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이는 처음부터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정치에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백에 하나일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문명과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는 까닭은 지도자들의 역할도 있겠지만, 「정당한 대의, 적어도 옹호할만한 대의」8가 반지성주의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지식인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든다. 지식인의 이미지에 대하여 J.D 밴스의 책,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를 보면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백인 노동자 계급의 견해가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식인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부정적으로 형성되고 반지성주의가 옹호될 수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미합중국이 할모의 두 번째 신이었다면, 우리 동네의 사람들은 종교와 비슷한 어떤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웃을 한데 결속시켰던 유대와 날 고무했던 애국심처럼, 이웃들을 고무했던 유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유대의 끈이 사라졌다는 징후는 도처에 널려 있다. 보수 성향의 백인 유권자 상당수(약 3분의 1)가 버락 오바마를 이슬람교도라고 생각한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보수층의 32퍼센트가 오바마를 외국 태생으로 믿는다고 대답했고 19퍼센트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이는 백인 보수층 대부분이 오바마를 미국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나는 지금도 지인이나 먼 친척들이 오바마를 두고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과 연관있는 사람이라거나 반역자라거나 혹은 멀리 떨어진 변방 국가에서 태어난 외국인이라고 말하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성인이 돼서 알게 된 친구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피부색 때문에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거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들타운 사람이 오바마 대통령을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까닭은 피부색과 전혀 관련이 없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아이비리그에 진학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버락 오바마는 아이비리그 두 군데를, 그것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명석하고 부유한데다 마치 법학 교수처럼(물론 실제로 교수였다) 연설한다.
오바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어렸을 때 존경하던 사람들과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명확하고 완벽하게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 오바마의 억양은 그저 생경하고, 그의 스펙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다. 오바마는 복잡한 대도시인 시카고에서 자랐으며, 현대 미국의 엘리트 사회가 자신을 위해 펼쳐진 사회임을 아는 듯이 매사에 자신감 넘치게 행동한다. 물론 미들타운 사람과 비슷한 역경을 혼자 힘으로 극복해낸 바 있으니, 그건 우리가 그를 알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지역 사회 사람들이 현대 미국의 엘리트 사회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고 믿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등장했다.9」


이들이 오바마에게 느끼는 이질감은 오바마가 자기 조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대통령임에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엘리트 사회를 대변하는 지식인일 거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식인을 떠올릴 때 어떠한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안경을 끼고 비리비리하며, 행동이 아닌 말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대중의 언어와는 조금 다른 고급스러움과 위화감을 주는 듯한 이미지, 권력과 결부한 도덕적 타락자로서의 이미지, 헛똑똑이,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 전달자 등등, 이러한 미지들은 대체로 다수 군중을 표방하는 노동자의 이미지와 다르다. 이 때문에 권력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려고 이러한 지식인의 이미지를 노동자들의 이미지와 대립시키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전략이 먹히는 까닭은 당연히 엘리트 지식인에 대한 이질감을 느낀 다수 청중이 이러한 지식인의 부정적 이미지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서민을 위한, 서민에 의한, 서민적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까닭 역시 우리 사회에 지성주의 또는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 지난 미 대선에서 힐러리의 승리할 것이라는 많은 언론의 예상을 깨고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일부 기사에서는 이러한 트럼프 당선의 이면에는 그의 반지성주의와 이에 동의한 백인 노동계급이 한몫했다고 앞다투어 말하고 있다.10 그렇다면 이 노동자들은 트럼프의 반지성주의를 왜 지지하게 된 것일까?

앞서 언급한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는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현대의 미국 사회에서도 적어도 옹호할만한 대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실히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는 지적인 사람들(엘리트) 들이 만들어낸 복지 정책이 정작 노동자 다수를 위하기보다 복지 여왕(Welfare queen)11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고 언급하며 저소득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 보장 정책이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저소득층 노동자들에게는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아동 보호 서비스와 위탁 가정 제도를 예로 들며 자기에게 가족과 같은 가까운 친척이 있는데도 이들을 당사자와 관련이 없는 제3자로 간주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제도는 힐빌리 가정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비참한 상황을 한층 더 비참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을 바탕으로 판단해보면, 이러한 정책들은 대체로 이들이 처한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고 위와 같은 불쾌한 감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과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현실 인식을 못하고 탁상 행정만 하는 지식인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12미국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트럼프는 이익을 내야 하는 사업가적 마인드와 실용주의적 사고관을 바탕으로, 사회 보장 정책의 맹점과 복지 정책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실을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하여 노동자들의 반감을 반지성주의로 이끌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거대한 문구인『미국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트럼프의 연설은 백인노동자층이 상실감을 회복하고, 옛 영광의 재현할 수 있는 대안처럼 보였고 또한 자기 앞에서 스스럼없이 세금을 남용하는 복지 여왕을 응징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트럼프를 백인 노동자들이 지지하거나 차선으로 선택한 주된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러모로 트럼프가 말하는 『미국의 재건』에는 마오쩌둥이 중국을 재건하면서 지식인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닮아있다. 그 안에는 자신과 계급이 다른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국가의 재건에 기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에 속해 있는 노동자 계급의 편이 아니고 이들에 대한 현실 인식을 못할뿐더러, 지배 계급에 예속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시대의 역사적 경험과 전통적 문화가
대한민국의 반지성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호프스태터는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이 나라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13」고 말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왕권이나 특권 계급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던 시대에서는 대중의 의견이 어떠하든 권력자들의 의지에 의해 사회가 움직여졌으며, 이들은 대체로 지성을 강조하고 권력화하는 엘리트주의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이 사회의 중심에 서는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 안에서는 다수 대중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특정 신조가 정해지게 되었고 반지성주의 역시 그러한 토양 위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미국의 역사적 경험은 지적 전통이나 지성에 공감하는 호의적인 토양을 만들지 못했다」라고 언급한다. 미국의 역사 자체가 유럽에 비해 지적 전통을 완성하기에 길지 않기도 했겠지만, 「영토 획득과 정복에 몰두하는 개척자 정신은 회의적이거나 창의적인 상상력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물질주의를 길렀으며, 지나치게 분방한 개인주의 역시 집단적 정신문화의 형성을 가로막기도 했다」고 한다14.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역사적 경험은 지성과 반지성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또한 유교주의, 집단주의 문화가 지성에 공감하는 호의적인 토양을 만들 수 있었을까?

조선 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왕도 정치, 소위 유교 사상에 의한 정치는 소수의 엘리트 계급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물론 다수의 대중 사이에서도 충, 효, 예와 같은 유교 사상의 깊은 지적 전통은 널리 퍼져왔고 인간의 도리로서 지켜져 왔다. 이러한 지적 전통은 조선 왕조를 600여 년 동안이나 존속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현실을 인식 못 하고 소수의 양반 식자 계급에 의해 수탈되어오던 현실들, 민중 사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던 양반 계급과 권력자들 탓에 또한 많은 문제를 겪어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왕권과 계급 위에서 운영되어오던 사회 구조에서는 반지성주의적 사고관이 널리 퍼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져서, 민주적 제도가 뿌리를 내를 무렵 특수 계급의 이익을 반대하고 민중의 처지를 대변하는 지식인이 점차 등장하게 된다. 문제는 지식인들이 이들을 대변할수록 이들에 대한 실망감 또한 증가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지식인의 등장과 함께 찾아온 일제의 침략은 지식인의 무능함을 보여줬고, 이들에게 협조하는 지식인들은 실망감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전쟁 중에 국민을 두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소위 ‘똑똑한 놈’들에 대해 울분의 감정을 갖지 않았을까?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격언처럼, 이러한 지식인들을 보면서, 그리고 이들이 받는 면죄부를 보면서 반지성주의와 출세 중심의 왜곡된 지성주의가 함께 형성된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의 역사적 경험을 시대 순으로 훑어볼 수 있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천만 영화 중 하나인 『국제 시장』이다. 이 영화가 이처럼 엄청나게 흥행하고 부모 세대의 향수를 자극한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심리적으로는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이어진 국가의 재건 속에서 자신들이 두 손으로 일군 시절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중에서 주인공은 역사적 재건 과정 속에서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그리기보다 산업 역군으로서 피와 땀을 흘리는 노동자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역사적 장면에는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지식인이 투쟁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50년대에 태어나 6.25를 겪고 자란 한 노동자의 애처로운 삶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한평생을 고생했던 주인공이 이제는 노인이 되어,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고 자기를 위해 희생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대한민국이라는 아들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했음을 보여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이토록 빠르게 재건한 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장남이며 훗날 아버지가 되는 인물의 인생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반지성주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 영화에서 전하는 국가를 재건한 아버지의 상은 많이 배운 지식인이 아니고, 두 손으로 세상을 일구었고 평생 자기 자식 혹은 다음 세대를 위하여 희생한 노동자임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들이 비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나라를 건설한 이들의 삶에는, 새로운 사상이나 지성과 관련된 교육보다도 정서적 규율이나 오래전부터 전해져 온 종교적(유교적) · 도덕적 원리들이 더 중요하고 신뢰할 만한 인생의 지침으로 새겨져 있으며 영화 역시 그 부분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관해 저자는 「복음주의와 원시주의가 미국인의 의식의 뿌리에 반지성주의를 심어놓는 데 일조했다면, 기업 사회는 반지성주의가 미국적 사고의 전면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15」라고 언급한다.

복음주의는 과거 프로테스탄트적 엄숙주의와 지루한 가르침에서 벗어나 굳건한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이르는 길이 교리 등의 까다로운 학식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에 기반을 둔다는 가르침은 기독교 토대 위에 세워진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그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상과 더불어 인간 내면의 ‘자연’을 되살리려는 원시주의로 말미암아, 문명화에 대한 비판적 정신과 함께 이상향으로 자연과 원시적 세계로 돌리려는 풍조를 이루었다.

또한, 미국인의 삶과 태도에 대해 「미국적 삶의 민주적 능력적 성격에는 항상 행동하고 결정하는 생활이 수반되었다. 대범하게 생각하는 습관, 신속한 결정, 즉각적인 기회 포착 등이 장려되었다」고 언급한다. 바로 이것이 기업 중심의 사회에서 필요한 자질이었으며 「토크빌 시대 이래로 미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기업의 행동주의가 이 나라의 자기 성찰에 압도적인 반대세력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카우보이 시절부터 개척자와 사업가로 살아오던 이들에게는 사업이 사냥이나 남성다움과 동일시 되었고 교양과 지성은 매력 없는 것, 여성적이라는 말과 동일시된 것이다.16


지성에 대한 경시와 더불어 사업에 대한 기업의 행동주의는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도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짧은 시기 동안에 산업화를 우선하여 국가를 재건해야 했던 정치적 판단 아래에서, 재벌과 기업 중심의 성장 주도 정책을 취하였고 자기 성찰과 비판은 표면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뒤로 미뤄둬야 했다. 근대화 과정의 폐해 가운데 자주 언급되는 이러한 측면이 한국인의 삶과 태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반지성주의가 한국적 사고 전면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학 교육에서조차 인문교육과 기초 학문이 수십 년간 무시되어 온 현실이 이러한 사회 구조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의 복음주의와 비슷한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신학에 대한 천시17 풍조를 그대로 안고 있다.


미국인의 의식의 뿌리에 기독교가 있듯, 아마 우리 의식의 뿌리에는 유교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일부러 학습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와 충, 효, 예를 강조하는 문화 아래에서 자라왔고 그에 따라 윤리·도덕 의식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그러한 문화가 우리 문명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양반 세습사회였던 조선 사회를 제외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의식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유교 문화를 반지성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


「孔子謂曾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姓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孝經》 (공자위증자왈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입신행도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 《효경》)
「공자께서 증자에게 말씀하셨다. 신체, 머리털, 살은 부모께 받은 것이라, 감히 헐게 하여 상하게 하지 아니함이 효도의 시작이고, 입신(출세)하여 바른길로 이름을 후세에 날려 이로써 부모를 드러나게 함이 효도의 끝이니라.」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려면 입신양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 유교의 기본 생각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서로 간의 경쟁이 과열될 때 많은 이들이 이것을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유교 관습의 폐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성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측면이 오히려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지식을 일종의 소유물이나 「훗날 살아가면서 확보하게 될 재산이나 사회적 특권에 상응하는 것18」으로 여기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지식의 추구가 개인의 내적 성장과는 별개로 단순히 소유물로서의 지식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의 측면에서 지성을 추구하는 집단의 양이 늘면 대체로 질적인 측면도 늘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여하튼 입신양명의 유교적 관념이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존재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학 입학이 입신양명을 위한 첫 관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개인주의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집단주의가 익숙한 요인 때문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자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독재의 횡포 앞에서 연대를 이루어 항의하는 대학생이 늘어났다. 

이러한 사례만을 가지고는 유교주의와 집단주의가 반지성주의를 억제하고 지성에 공감하는 토양을 만들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환점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행동하는 지식인 집단으로서의 대학생의 출현은 필시, 입신양명을 위한 전 세대의 전방위적 노력의 일환 가운데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지성주의를 몰아낼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이 나라의 민주적 제도나 평등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평등 사회에서 사람들은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존재하면 지성이나 성찰적 지식을 추구하기보다 반지성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선의의 모습을 하고 우리의 의식을 침투한다. 자연주의나 경험론, 직관과 행동주의, 때로는 앎이란 이른바 상식적 지각이 가져다주는 기만성(欺瞞怯)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철학자들의 인식19등이 그렇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의 충동 안에 기생하는 천민자본주의 또는 물질 만능주의처럼, 앎과 무지에 관한 사상가들의 참다운 인식 속에서도 반지성주의가 기생할 수 있음을 일컫는다. 

또한, 우리는 권력에 시녀가 되는 지식인을 보기도 하고, 우리와 전혀 다른 부를 지니고 있거나 말, 행동을 비롯한 모든 행동 양식이 남다른 상류층 지식인들도 보아왔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의 보며 생기는 반감은 그들 개인을 향한 반감을 넘어 특정 집단에 대한 반감으로 증폭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이렇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면, 반지성주의는 언제든 생겨날 수 있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 「과거의 자유로운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지적인 삶을 인정한 점」이라고 말하며 「그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지식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20

우리의 사회는 다양한 유형의 지식인을 인정하는가? 지식인이 되려면 교수가 되어야 하고, 작가가 되어야 하고, 정치가가 되어야만 그를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조금은 우스개일 수도 있지만, 장 폴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전문가들은 많아졌지만,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 까닭은 우리 사회가 지식인에 대하여 권력과 권위를 갖춘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로 은연중에 오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저자는 다양한 스타일의 지식인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면 「솔직함과 관대한 정신이 필요하다」21고 말한다. 혹자는 민주주의 사회의 장점을 두고 다른 의견을 솔직하게 말한 권리와 관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합리성을 배제한 채, 자신과는 다른 의견과 다른 사람을 경멸할 반지성주의적 권리도 용인된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으로 이어진 우리 세상은 대중의 정서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도 쉽게 지식인에게 압도적인 비난을 할 수도 있고 그러한 세력을 쉽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지식인은 자신에게 떳떳할지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사회에서 지식인은 자신을 지켜줄 알맞은(?) 직업적 후광과 사회적 방패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출처: 조선Biz

우리는 지성의 토양 위에서 자라나는 다양한 지식인들을 인정함과 동시에 반지성주의의 토양에 놓여 있는 이들의 처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과거 지식인의 사회적 위치는 모호했다. 지배 계급도 아니고 피지배 계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무능력하면서도 불안정한 위치의 ‘모호함’이 지식인의 계급적 토대였다. 그러나 지금의 지식인 계층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 위치는 단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J. D. 밴스의 말처럼 러스트 벨트(그림출처: 조선Biz)22, 백인 노동자 계급의 주변에 존재하기보다 예일 대학의 교정에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 만한(사르트르의 말처럼)’ 생활의 여유가 있다. 그러나 단순 노동 계층만을 볼 때, 그들에게 지식인들처럼 지성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었을까? 혹은 이들에게 지식인 가정처럼 학업과 지성을 키울 만한 선택권을 줄 수 있었을까? 대를 거쳐 문화적 빈곤과 궁핍한 환경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고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처럼 극히 희박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식인의 말은 거짓이며, 지성은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반지성은 승리할 것인가?

우리의 미래가 조지 오웰의 『1984』의 세계처럼 반지성이 지성을 몰아내고 결국 승리한 세상이 될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지성인과 비지성인이 철저하게 구별되는 완벽한 계급 사회가 될지 알 수 없다. 태양이 존재하면 언제나 그 이면에는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반지성주의는 어쩌면 이 땅 위에서는 영원한 해결책이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한 해결책이 없더라도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한 세상 중 가장 좋은 세상’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가장 좋은 세상이 철저하게 반지성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거나 철저하게 계층 구분이 이루어진 세뇌된 행복으로 사는 세상이리라 생각지 않는다. 바라건대, 이러한 세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어지는 동등한 권리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쩌면 '가능한 세상' 중에는 특정 집단이나 사조가 주류가 되어 하나의 관점 외에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세상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세상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의 모습만 탈바꿈한 채 끊임없이, 언제 터질지 모를 반지성주의라는 폭탄을 심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미 그 이름이 너무나 다양하여 우리는 전부 언급할 수조차 없다. 그래도 몇 가지를 밝힌다면 그것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헤게모니라는 이름,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이 존재하는 한 그 반대편에 양팔 저울처럼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쥐고 있던 비판과 자성, 관용과 양심 끈을 놓칠 때 세상은 아주 쉽게 반지성주의로 기울여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의지가 이내 그 끈을 다시 붙잡아, 역사의 저울을 지성의 편에 두리라 믿는다. 


2017. 10. 13.



1 리처드호프스태터, 『미국의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American Life〉』,교유서가, p. 25

2 위의책, p.46

3 위의책, p.69

4 위의책, p.49

5 위의책,pp. 44~45

6 프랑크디쾨터,『문화 대혁명〈TheCultural Revolution〉』,열린책들,pp. 85~87

7 리처드호프스태터,앞 책,pp. 260~262

8 리처드호프스태터,앞 책,p. 46

9 J.D. 밴스,『힐빌리의노래』,흐름 출판,pp. 312~313

10 http://weekly.donga.com/Rel/3/all/11/785531/1

11 미국에서 사기 또는 속임수로 과도한 복지 수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위키 백과 : Welfare queen〉

12 J.D. 밴스, 앞 책, p. 389

13 리처드호프스태터,앞 책,p. 555

14 앞의책,p. 560

15 앞의책, p.84

16 앞의책, p.85

17 https://ko.wikipedia.org/wiki/한국의_기독교

18 에리히프롬,『소유냐 존재냐』,까치,p. 68

19 리처드호프스태터,앞 책,p. 66

20 위의책, p.590

21 위의책, p.591

22 러스트벨트(RustBelt)는 미국의 중서부지역과 북동부 지역의 일부 영역을 표현하는 호칭이다.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디트로이트를 비롯해 미국 철강 산업의 메카인 피츠버그,그 외 필라델피아,볼티모어,멤피스 등이 이에속한다.

이 지역은 미국경제의 중공업과 제조업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이 곳은 1870년대미국 제조업의 호황을 구가했던 중심지였으나 제조업의 사양 등으로 인해불황을 맞은 지역이다.이 지역의 많은도시에서 생산이 진행되자,역으로 심한 불경기가오게 되었다.특히 자동차 산업의회복이 급선무가 되고 있다.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결정지은 지역이다. 〈위키 백과: 러스트 벨트〉, 그림 :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3/16/20160316000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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