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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01. 2019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저.」 리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난 어릴 때 참 콤플렉스가 많았던 것 같다. 누구든 자기 자신의 외모나 능력에 대해 고민을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어릴 적에 찢어진 눈과 곱슬머리, 추레한 옷차림 등은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둡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사람마다 그러한 콤플렉스에 대해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겠지만 나는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두고 1년 2년이 되도록 거들떠보지 않는 고깃덩이처럼 그렇게 깊은 곳에 담아 두었다. 하지만 순진했던 어린 시절, 어느 순간 들려오는 놀림이나 자신의 콤플렉스에 대해 자각할 때에는 냉장고 깊은 곳에 있는 그 고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을 했었다.

외모를 바꿀 마음은 절대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었기에 친구들처럼 옷이나 외모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차라리 그 돈이 있으면 책을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시절 내가 이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그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점 때문에 공부도 나름 했고 운동도 남들보다 열심히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고 더욱 더 똑똑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순해 빠져서 무슨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나 여자애들과의 논쟁이나 말싸움에서는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여자애를 말싸움으로 울렸다. 힘을 쓰거나 싸운 것도 아닌데 말로 그 아이가 다시는 내게 덤비지 않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유치할 노릇이지만, 그때 처음으로 승리(?)에 대한 도취감을 얻었던 것 같다. 마치 방언이 터져 나오듯 말이 나왔고 그게 바로 내가 읽었던 책들에서 나온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당시에는 이러한 백과사전이 유행이었다.>


그때는 부단히도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처음으로 어머니가 사주셨던 100권짜리 문고판 소설집을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 화장실로 가는 바닥에 떨어진 2만 원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장하다고 원하는 게 뭐냐고 해서 당시 학교 방문판매로 왔던 책 파는 아저씨(그 당시에는 그런 게 많았다.)의 책을 구매하고 싶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책과 더불어 16권으로 된 백과사전은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재미가 있었다. 올 컬러판의 책이었던 백과사전을 통해 뭔가 다양한 지식을 얻었던 것 같다.

그러한 것들이 큰 힘이 되었다. 비록 내가 힘으로는 약하지만, 머리로는 약하지 않다는 자신감. 그리고 싸움 잘하는 애들도 나를 깔보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그렇게 시작한 것이 책이었지만 곧이어 지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덕(悳)이 있어야 하고 건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인간의 예의범절을 강조하셨던 영향이 컸다. 나는 그때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놀랍다. 그 때만 해도 아버지는 당연히 공부나 지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길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가정 통신문에 학생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의 범절'이라고 적어 보낼 때 어린 나로서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공부보다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그 단순한 말은 나를 변화시키게 만든 또 하나의 계기였다.

인간에게는 지(智)와 덕(悳)과 체(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중학생 때에는 남는 시간을 쪼개어 운동을 병행했다. 무엇보다 웬만한 애들에게 지거나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철봉과 평행봉, 줄넘기를 했다. 특히 중학교 때 처음 배운 평행봉은 나를 미치도록 즐겁게 만들었다. 특히나 남들은 하나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식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아마도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주변에는 지식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들에게는 지식보다도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했다. 지식과 힘, 그리고 그 바탕에는 덕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오늘 단숨에 읽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어린 시절의 나의 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비단 외모뿐 아니라 나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어두운 면이었고 그는 그것조차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였다. 내게 있어 그런 존재는 어린 시절 신앙이 좋았을 때 신으로부터 느꼈던 기분 이외에는 없던 것 같다. 여자애들이 나를 좋아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나 역시 그러한 부분에 관해서는 관심 없는 척을 많이 했다.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가 나를 너무나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신이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서 나를 좋아해 주고 아껴주고 보듬어 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물론 한 창 사춘기 시절에는 남고를 다녔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못 받은 것도 있으리라 싶지만 그래도 때로는 부모 이외의 누군가에게 그러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정말 <예쁘고, 안 예쁘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여자에게서 때로 어떤 광채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나면 온종일 그 애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호감, 좋아함, 사랑의 감정은 그런 것이다. 외모를 떠나, 말로 하지 않아도 무언가 특별한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데도 지워지지 않는 것. 비단 연락을 하지 않아도 뭐를 할까 궁금한 것. 막상 만나 할 말이 없어도 같이 있고 싶어지고 보고 싶은 것. 그러면서도 혹시나 상대방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난 아직 냉동실에 있는 그 고깃덩어리를 꺼내지 못했다. 그것을 버려야 그 안에 위와 같은 다른 것을 채워 넣을 것을 알면서도 집어 들었다가 이내 다시 깊은 곳으로 몰아넣는다. 언제쯤 되어야 꽁꽁 얼어버린 그것을 녹여서 먹어 버리던가 혹은 그냥 쓰레기통에 버릴지는 모르겠다.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삶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알랭 드 보통은 누군가, 무엇과의 '비교'는 금물이라고 한다. 헨리 데이벳 소로우는 물질적 가치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라고 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가치를 말씀하신다.


"누군가를 부러워하지도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 그리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혹시나 무언가,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한 것은 아닐까? 요즘 들어 날 부럽게도 부끄럽게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내 손을 꼭 잡아 줄 수 있는 존재, 날 기억해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갈망이 깊어진다. 따뜻한 집에서 홀로 있는 것보다 겨울의 눈길 위에서, 극심한 눈보라를 헤치고 나를 특별하게 기억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이 더 값지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끝.〉


2013.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위한 음악 자료.


p.16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p.17 빙 크로스비, White Christmas

p.26 모리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

p.34 브리트니 스피어스, Baby One More Time

p.69 로버타 플랙,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p.97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p.120 존 레논,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p.126 닐 영, Heart of Gold

p.133 비틀즈, Something

p.142 딥 퍼플, Smoke On The Water

p.142 재니스 조플린 Summertime

p.146 UFO, Lipstick Traces

p.150 비틀즈, Black Bird

p.150 핑크 플로이드, Dark Side of the Moon 앨범

p.183 엘비스 프레슬리, Love Me Tender

p.184 이시다 아유미, Blue Light Yokohama

p.190 모리스 라벨, 모음곡집 어미거위 중 난쟁이

p.196 비틀즈, Strawberry Fields Forever

p.232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Der Lindenbaum)

p.236 슈베르트, 송어

p.242 마이클 잭슨, 빌리 진

p.254 에릭 사티, 짐노페디

p.291 밥 딜런, The Freewheelin' 앨범

p.292 밥 딜런, Blowin' in the Wind

p.303 밥 딜런,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p.314 밥 딜런, A Hard Rain's A-Gonna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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