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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28. 2019

『생명이란 무엇인가 - 에르빈 슈뢰딩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같이 읽기.


생명이란 무엇인가? 흔히 생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체로 생(生, life)과 죽음(死, death)을 대조하여 말하거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성경을 믿는 이들은 생명을 신이 주신 고귀한 숨결 또는 에너지라고 할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은 철학적이며 추상적인 개념들이다. 그것은 단지 삶의 의미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 현상에 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히긴 어렵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 현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전자 구조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과학적으로 생명에 대해 고찰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책은 1943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을 기초로 저술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살아 있는 세포의 물리적 측면」의 관점에서 다양한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해 나간다.

저자는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 성분인 염색체가 그 크기가 매우 작아 주변의 열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에도 비교적 안정적이며, 대를 이을 수 있는 영속성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 그 내부의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에 있다는 것을 예측했다. 말하자면, 비주기적 결정 구조를 가진 유기체는 열운동의 무질서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구조가 있으며 그것 역시 양자역학의 물리학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유전자야말로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 성분이며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유전자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야 한다〈제임스 왓슨, 이중나선, 31p, 궁리〉」라는 과제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의 책에 영향을 받은 프란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은 1953년에 유전자의 구조가 주변 분자(물 분자)들의 공격(브라운 운동)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중나선」 구조임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가 과학 발전에 기여한 것과는 별개로 생명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는 마지막 장의 후기를 제외하고 철저하게 과학적이다. 자신이 가진 과학적 지식과 세포와 염색체에 대해 밝혀진 사실을 단서로 검증과 추론을 해나가는 모습은 마치 범행 단서를 바탕으로 범죄자의 특성을 추론해 나가는 CSI의 프로파일러와 같은 느낌을 준다. 더불어 장 중간에 앞 장에서 말했던 논의의 오류가 발견되면 그것에 대해 수정을 하는 노학자의 겸손함도 보여준다.


 곧 밝혀지겠지만, 그 물리학자는 기여를 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물리학자 자신의 이론적 예측과 생물학적 사실을 비교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통해 그 예측을 (물리학자의 전체적인 생각은 꽤 타당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정도로 수정할 필요가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옳은 견해에 (혹은 더 겸손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옳은 견해라 주장하는 것에) 점진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나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의 접근 방식이 정말로 가장 단순하고 최선인지 여부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방식은 간단히 말해서 나의 방식이다. ''소박한 물리학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의 꾸불꾸불한 길보다 더 낫거나 명쾌한 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에르빈 슈레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23p 中. 궁리〉


잘 모르는 분야를 학문적으로 접근할 때, 자신을「소박한 물리학자」로 낮추면서도 이 유기체의 생명 현상에 대해 기여를 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진리를 탐구하는 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후기의 주관적 견해는 그의 앞 장의 과학적 태도와 상치되지만,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고찰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유기체 내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한 과학적 태도와 겸손함은 뉴턴이 죽기 전에 썼다던 이 글에서도 발견된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161p 中, 사이언스 북스〉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이용하는 ‘양자역학과 통계 물리학적 접근법’에 대한 그의 친절한 예시와 설명은 이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나 ‘열운동에 의한 질서와 무질서(엔트로피)’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 자체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연이 바탕인 만큼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예시를 통해 내용을 전달한다. 특히 양자역학의 원자 배열과 영속성을 가지는 유전물질을 비교하는 부분은 유전 물질이 엄청나게 작으면서도 열운동의 흐트러뜨리는 힘을 견딜 수 있는 구조가 분명히 존재함을 예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설도 아닌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 이 책이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 또는 그보다 앞서 ‘양자역학’과 ‘통계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하게 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등장 이후 마냥 합리적이지만 않은 인간이라는 종을 이해하려고 대중의 무의식이나 심리를 탐구하려던 그때, 「양자역학」이라는 20세기를 여는 하나의 학문이 열리려던 그때에, 이 이론이 인문·사회를 다루는 학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까?


뉴턴 역학에 따라 시작되어, 「세상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세워진 과학적 합리론이 수많은 인문주의자와 사회학자, 정치가들의 손에 의해 사회에 비판 없이 적용되었음에도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때에,


 「물리법칙이 원자들의 통계적 행동에 의존하며 적은 수의 원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법칙 아래 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엄청나게 많은 원자들이 함께 행동할 때만, 통계적인 법칙들이 그 집단의 행동을 원자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증가하는 정확도로 통제하기 시작한다.〈에르빈 슈레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28p. 궁리〉」

라는 이 통계 물리학적 이론은 가히 충격이며, 역사의 진보 과정과 시간과 공간 위에 존재하는 집단과 개체에 대해 진지하고 폭넓은 고찰을 하는 데 힘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면 희열을 느낀다. 또한, 그가 말하는 수많은 가설과 이론 그리고 예측은 그동안 과학적 지식과 교양을 위해 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의 등장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비단, 왓슨의 『이중 나선』뿐 아니다. 염색체 섬유를 「유기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같은 책, 141p.)」라고 말한 부분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양자 뛰어넘기’와 돌연변이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말한, 「이성질체의 에너지 준위와 에너지 문턱, 양자 뛰어넘기를 위해서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같은 책, 92p.)」라고 말하는 부분은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핵심이 되는 패러다임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이나 역사를 유기체적 관점으로 볼 때 진보에 대한 관념을 떠올리게 한다. 논란이 많은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언급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이 아니더라도,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같은 불교적 관념이나 칼 융이 말하는 의식의 ''원형''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지막 장의 후기는 그의 과학적 태도와는 다른 지극히 주관적 견해이며 (서구의 합리주의나 인간 소외 현상에 갈증을 느끼던 지식인들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대안으로 삼았던) 동양의 종교나 신비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과학자임에도 인간의 의식과 정신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고찰을 하려는 그의 자세는 물질에 기반한 과학을 보다 유연하게 해주며, 생명이 「물질을 기반으로 한 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¹

물론 이 겸손한 노 학자가 이런 후기를 쓰면서 발생할 논란을 예상치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생명이 가진 이 기묘한 메커니즘이, 지금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밝혀지길 바라는 노 학자의 기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생명의 신비는 단 한 번에 한꺼번에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²

책을 덮고 자신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쳐 탄생한 이 우주와 생명과 그리고 인간,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우리도 코스모스의 일부이다. 이것은 결코 시적 수사가 아니다. 인간과 우주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연결돼 있다. 인류는 코스모스에서 태어났으며 인류의 장차 운명도 코스모스와 깊게 관련돼 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 있었던 대사건들뿐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까지도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기원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우주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본질과 만나게 될 것이다. - 칼 세이건


그가 마지막 장에 말한 후기는 칼 세이건이 그의 책에서 말한 이 대목을 인간 정신의 영역까지 확대한 것이리라. 혹 누군가 칼 세이건의 책을 펼치고 코스모스적 대(大)우주를 상상했다면,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펼쳤을 때에는 카오스적 소(小)우주를 상상해보기를 바란다.


문득,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라」는 구절이 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떠오른다.


순수의 전조³ (윌리엄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상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중략>


  〈2016. 01. 12.〉



주.

1 형이상학적 고찰 또는 그의 종교적 성찰이 담겨 있는 마지막 후기를 두고 「물질에 기반한 과학을 보다 유연하게 해준다」는 말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많은 고민을 했다. 수많은 과학계의 거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과학의 언어는 물질과 운동에 질서를 부여하며 가설과 검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그의 자세는 과학자의 자질로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 또는 의식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생명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물질의 다른 축인 ''정신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고민하고 가설을 설정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당시나 지금의 과학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단계라 하더라도 말이다. ''보다 유연하게'' 해준다는 말은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자론에 기반한 가설과도 같은 것이다. 고대의 그러한 가설이 18세기 돌턴에 이르러 이론화 된 것처럼 언젠가는 정신의 영역 역시 그러한 가설의 검증이 일어날 것이라는 노 학자의 철학적 사색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그게 맞든 맞지 않든 간에 그는 논란을 만들어 냈고 후대에 이르러 데모크리토스처럼 ''슈뢰딩거는 말년에 이르러 정신에 관해 하나의 가설을 말했다''라고 기록될 수 있을테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불어 ''유연성''의 또다른 측면으로 물질 이상의 인간 정신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 정신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이 심리학이나 뇌과학 등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것을 과학 영역의 확대 또는 유연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2 이 말은 다음을 일부 패러디한 것이다.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한다면, 지금은 짙은 암혹 속에 감춰져 있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거기에 빛이 비쳐 그 안에 숨어 있는 진리의 실상이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애로는 부족하다. 누가 자신의 일생을 하늘을 연구하는 데만 온통 바친다고 하더라도, 우주와 같은 엄청난 주제를 다루기에 한 사람의 일생은 너무 짧고 부족하다....... 진리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밝혀지게 마련이다. 우리 먼 후손들은, 자신들에게는 아주 뻔한 것들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었음을 의아해할 것이다....... 수없이 많은 발견이 먼 미래에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서 밝혀야 할 그 무엇을 우주가 무궁무진으로 품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 우주가 혹시라도 그러한 우주라면, 우리는 그것을 한낱 보잘것없고 초라한 존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는 단 한 번에 한꺼번에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출처는 〈세네카, 『자연학의 문제』 제7권 1세기〉이며 칼 세이건 『코스모스』의 머리말이기도 하다.


3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년 11월 28일 - 1827년 8월 12일)는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다. 아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예언)』 일부이다.

Auguries of Innocence
(William Blake)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중략)

순수의 전조
(윌리엄 블레이크)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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