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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05. 2019

가능한 세상 가운데 가장 좋은 세상을 위하여.

도서『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 볼테르』리뷰



누구도 이 세상이 가능한 세상 가운데 가장 좋은 세상일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겪는 불행 역시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많은 경우 불가항력적으로 이뤄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 불만은 있으나 변화를 위하여 발버둥치려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으며, 앞으로의 날들에 대하여 불행해질 것을 생각하기보다 그저 최선인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아간다. 우리가 스스로 세상을 가꾸려 하기보다 운명이나 시대의 흐름, 혹은 몇몇 정치인에게만 세상을 맡기는 행위는 사실, 이 세상이 비교적 잘 돌아갈 것이라는 낙관주의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캉디드 역시 그렇다. 캉디드와 주변인들은 수많은 불행을 겪지만, 위대한 철학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팡글로스가 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론은 신봉하며 그것을 소설 전체를 통해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겪는 불행조차도 이 세상에서 최선의 상태라는 것이다.  


캉디드는 베스트 팔렌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툰더 텐 트론크 남작의, 존재할 수 있는 성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성에서 살다가, 가장 아름다운 퀴네공드 양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를 사랑했다는 원인으로 내쫓김을 당하는 최선의 결과를 맞이하면서 불행한(최선이라 여기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불가리아군에 들어가고 모진 구타를 당하며 여러 사기와 기만, 폭력을 경험하면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에서 최선의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그러던 중에 가장 최선의 세상처럼 보이는 엘도라도를 여행하면서 물질적 부가 오히려 세상의 불행을 갖다 주는 씨앗임을 인식하고 이곳이 최선의 세상일 것이라 생각하여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귀네공드양을 다시 만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다시 구하고자 (그곳에서는 무가치한 돌덩이 밖에 되지 않은) 수많은 보물을 들고 세상으로 나온다.   


그들은 여행 중에 아름다움을 잃고 추해진 귀네공드 양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행을 겪은 동료들을 다시 만난다. 이들의 불행을 통해 세상 어느 누구도 불행을 겪지 않는 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이 점점 비참해져가는 것을 보며, 인간이라는 동물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원인과 결과에 대해, 가능한 최선의 세상에 대해, 악의 근원에 대해, 영혼의 본성과 예정 조화에 대해 고민을 한다. 그러나 캉디드의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오로지 한 선한 노인을 통해 노동을 통하여 권태, 방탕, 궁핍이라는 세 가지 악을 물리칠 수 있음을, 그리고 그가 그 어떤 왕보다도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캉디드는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원(jardin)을 가꾸어야 함을 깨닫는다. 


정원은 우리가 누려야 하는 공간이다. 작게는 노동을 통해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영토이며 우리가 최선의 상태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삶이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가꿔나갈 이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정원은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세계이며 저자는 이 세계를 사는 이들이 가장 최선의 상태를 이루고자 한다면, 노인과 같은 작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작은 땅을 소중하게 일구듯 노력하여 권태와, 방탕, 궁핍이라는 악을 몰아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권력자들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이미 최악의 상황을 경험해왔다. 물론 이것이, 캉디드가 그토록 믿고 싶어하던, 가능한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 이 땅 위에 존재한다면, 근대화의 과정 중에 겪은 수많은 역사적 상처가 민주주의라는 열매를 맺기 위한 숙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 가능한 세상에서 최선인지 모른다. 다만, 역사의 기록을 통해 그 시대가 평가와 재평가가 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정원을 타인에게 맡기고 아무런 생각이나 의심없이 가능한 세상 가운데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낙관할수록, 우리는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세상에 살게 될 거라는 점이다. 


비록 우리가 선과 악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혹은 지금까지도 증명되지 않은 수많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확답할 수 없더라도, 존재하는 이 현실세계(지도 상에 사라진 엘도라도나 에덴동산이 아닌)에서 가능한 세상 중 가장 좋은 세상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정원을 우리 손으로 가꾸어야 한다. 이 점이 바로 저자 볼테르가 현재를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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