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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20. 2019

살아 숨 쉬는 미술을 위하여.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아마도 퓰리처 사진전이었던 것 같다. 다양한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몇몇 사진들이 내 머릿속의 종을 울리게 했다. 무언가 띵하며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랄까? 때때로 어떤 예술 작품을 볼 때 나는 그런 기분을 접한다.  구도에 대한 지식도 없고,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왼쪽 또는 오른쪽 아래에 적힌 제목뿐이었지만 그 작품이 대단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작품을 두고 가기가 너무나 아쉬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밖을 나설 때도 여운이 남아 다시 그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런가 하면 대학생 시절에 취업이 벽에 부딪히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까?' 한참 고민할 무렵, 나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들고 무작정 경주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뚜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숨 쉬고 싶다는 생각,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이미 1천 년부터 존재했던 유물을 감상하러 가는 게 아이러니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책 안에서 사진으로 존재하던 그 문화재들은 나보다 더 생생히 살아서 숨 쉬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나는 정작 숨통이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탑도, 절도, 하다못해 죽은 왕의 무덤조차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좋아 겉표지가 닳을 정도로 보았고 더 나아가 저자가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로 경주를 사흘 동안 돌아다녔다.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대왕암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에 나온 곳 중 하나라도 놓칠세라 쉬지 않고 곳곳을 누볐다. 문화재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일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서 알았던 문화재를 온몸으로 접하고 나니 왜 그것들이 왜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경주의 유명한 문화재들도 좋았지만, 나의 시선을 더 끌었던 것은 어느 이름 모를 탑과 적막이 감도는 거대한 옛 임금의 무덤에서였다. 특히 탑 옆에는 백로인지 황새인지 모를 한 마리 새가 목을 길게 빼다 접으면서 천천히 한 걸음씩 다리를 옮기고 있었다. 나는 그 새와 오래된 이 탑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던 그 상황에서 나는 백로를 보았고 탑을 보았고 햇빛을 보았고 바닥에 자라는 풀과 벼를 보았고 그 속에 있는 나와 바람과 그리고 적막을 보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박물관 밖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안에 있는 우리의 미술품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단순히 어떤 특정 작품에 대한 정보만을 알려주기보다는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감상해야 하는지 일러준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이 책은 그 제목에 『특강』이 있는 것처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녹음하여 책으로 편집한 것이다. 그 때문에 상당히 쉽고 재밌으며 생생하다. 구어체의 문체가 가질 수 있는 생생함, 마치 박물관 큐레이터가 작품을 앞에 두고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는 김홍도의 <씨름>을 보면서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사연을 끄집어낸다. '왜 이 아이는 웃고 있을까? 왜 이 사람은 상투를 틀고 있을까? 이 사람은 왜 입을 악물고 있지? 씨름에서 누가 이길까?'



그림을 풀어내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마치 이렇다. 


단옷날이 되어 씨름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씨름은 지금의 씨름과 마찬가지로 승자 승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씨름판 주위로 둥글게 앉아 씨름을 감상하고 있다. 상투를 튼 지 얼마 안 되는 김 서방은 씨름이 재미있긴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조금은 피곤하여 비스듬히 누워 감상하고 있다. 그 뒤쪽으로는 어린아이들이 애들은 가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조용히 앉아서 입을 헤벌쭉 벌린 채 씨름을 감상하고 있다. 우둔하여 어릴 적에는 놀림을 받았던 이 진사네 아들도 씨름을 감상하고 있다. 지금도 그는 몸집이 산만 하여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다. 양반이라면 갓을 제대로 써야 할 것이지 이놈의 양반은 몸도 그렇지만 갓도 제대로 동여매지 못하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감상하고 있다. 그 뒤로는 노인인 김 초시가 있는데 얼굴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응원하고 있던 씨름꾼이 질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 왼쪽 가운데를 보면 엿을 파는 소년이 씨름판이 흥해서 장사가 잘되었는지 그림 바깥을 향해 헤벌쭉 웃고 있다. 엿판 위에는 엽전 세 냥이나 올려져 있다. 씨름이 한 창을 달리고 있고 드디어 한 명이 넘어가려고 한다. 으라차차! 평소에도 힘이 장사이고 쌀 한두 가마는 손쉽게 드는 갑돌이가 드디어 힘깨나 쓴다고 자랑하고 다니던 젊은 녀석을 넘어뜨리기 일보 직전이다! 사람들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쪽으로 넘어질세라 몸을 뒤로 뺀 상태로 한순간이라도 멋진 씨름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본다. 


그림은 우리에게 이러한 다양한 말과 사연을 전한다. 그림을 보는 것과 읽는 것은 이렇듯 차이가 있다. 그림을 감상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림을 본다.'가 아닌 '그림을 읽는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바라보는 일차적인 행위가 아닌 적극적으로 달라붙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도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그것! 우리는 오주석 님의 웃음이 넘치는 특강을 통해 우리는 그림을 더욱 즐겁게 읽게 되는 것이다.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정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알려고 하려는 노력, 사랑하는 마음은 그림을 관찰하도록 하고 관찰 속에서 새로운 앎이 탄생하는 것이다. 앎은 섬세한 붓의 필치 속에서조차 이야기를 발견토록 하고 그 안에서 우리 삶의 경험과 추억이 결합하여 커다란 감동을 얻도록 한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그림을 똑같은 거리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림의 대각선을 기준으로 1~1.5배의 거리에서 볼 것,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쓰다듬듯이 볼 것,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부를 찬찬히 뜯어 볼 것.' 이 세 가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책이 그러한 감상법만을 다룬 책이었다면 매력이 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그림이 어떻고 저렇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림을 사랑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느끼도록 한다는 데 있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을 때, 어머니의 보름달 같은 얼굴과 초승달 같은 눈, 그리고 두꺼운 손과 마디 사이의 주름들이 떠오르고 그 손에 담긴 어머니의 사연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처럼, 그림의 붓 필치에 담긴 사연과 작가의 생각이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유도한다. 비록 그것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마치 우리가 명화를 보면서 이것이 외설인지 예술인지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것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느 한 사진 앞에서 서성거렸던 감정이었고, 천년고도 경주의 여러 사연을 알고 나서 실제로 감상했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된 경험이기도 하고,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 모르는 탑에 새겨지고 바라진 흔적들을 보면서 나름의 사연을 생각했을 때 느껴졌던 울컥한 기분이기도 하다. 

그러한 느낌은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는 그림을 감상하는 나를 그림의 한가운데로 이끌어 그림의 한 장면 또는 인물이 되도록 한다. 마치 경주에서의 이름 모를 탑과 백로가 있는 그 풍경 속에 자기 자신마저 한 폭이 그림이 되어 존재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알게 되니 보이고, 보이고 나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나는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을 통해 한국의 미술 작품을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되니 이들의 작품에 담긴 사연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예술과 정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추신. 

여자들 가운데 간혹 병적인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나를 얼마만큼 남들과 다르게 바라봐주고 있느냐는 질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계속 관심받기를 원하는 욕망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재들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재 역시 자신을 보러온 사람들에게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넌지시 묻고 있다.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그들이 온몸으로 말하는 사연들을 이 책을 통해 한 번쯤 알아보고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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