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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26. 2019

존재, 사랑 그리고 고독에 관하여.

도서『스토너 – 존 윌리엄스 저』리뷰.


존재의 이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땅 위에 태어나서 나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까?

이따금 나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삶의 모든 일이 긍정으로 가득 차 있던 푸르른 여름과도 같은 젊은 날에는 더욱 그러했다. 삶은 불과도 같았고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나의 미래를 멋지게 완성해줄 것만 같았다. 젊은 시절의 어느 단계에는 그러한 긍정이 넘쳤다. 특히 2년 동안의 군 생활의 억압 속에 서 벗어나 일상의 자유를 느끼던 바로 그 시절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삶은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장밋빛 미래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의 미래는 이따금 고개를 들 때면 보이는 세상의 우울함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되뇌며 나 역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보자고 마음을 먹은 이후로 나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모두가 가는 길을 택했더라면 나는 어쩌면 번듯한 직장에 가정에 어여쁜 아이를 둔 단란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초라할 대로 초라한 단칸방에서 사는 누추한 백수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도중에는 불행만 있던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다양한 선택과 일들로 가득 차 있기에 불행한 일보다 행복하거나 즐거운 일들이 더 많이 기억되며 실제로도 더 많았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 오로지 나의 시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세상의 시선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절망하고 무너지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무서워 움츠러든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작

노란 숲 속에 길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오랫동안 서있었다,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구부러지는 데까지
눈 닿는 데까지 멀리 굽어보면서.
그리고 다른 한 길을 택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좋은 이유가 있는 길을,
풀이 우거지고 별로 닳지 않았기에;
그 점을 말하자면, 발자취로 닳은 건
두 길이 사실 비슷했지만,
그리고 그 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아직 밟혀 더럽혀지지 않은 낙엽에 묻혀있었다.
아, 나는 첫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두었다!
길은 계속 길로 이어지는 것을 알기에
내가 과연 여기 돌아올지 의심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나는 한숨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 책에 끊임없이 여러 형태로 등장하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나는 답하고 또 답하지 못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공하기를 바라며 그것이 내게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며 나는 삶의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기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진정 내가 태어난 이유인가?’에 대하여 스스로에게는 답을 하지 못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아처 슬론이 스토너에게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라고 했던 말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 누군가가 내게 그러한 말을 해주었더라면 나의 길도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품고 한숨을 쉬었을 테지만…….

세상은 언제나 자신이 걸어온 방식대로 길을 걸으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때때로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선택하라고 강요를 한다. 그러한 강요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게 옳은 게 될 수 없음에도 모두에게 좋으면 나에게도 옳은 것이라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러한 것들을 거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괴짜 소리를 듣거나 사회생활을 못 하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동물원에서 태어난 동물이 동물원의 관습에 따르는 것은 사실 동물의 본성에는 맞지 않는 억압인 것처럼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관습이 자신의 본성에 모두가 다 맞다고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세상을 향해 발버둥 쳐봤자 어쩔 수 없으니 슬플 수밖에.)

어쩌면 우리는 그런 세상이라는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일지도 모른다. 본성을 숨기고 동물원에서 주는 사료만을 받아먹는 것에 만족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그것에 만족하며 순응하는 것이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좋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스토너와 같은 이들은 언제나 그의 적과 아군 모두에게 불편함을 끼친다. 그 존재와 행위로 말미암아 이곳이 동물원이고 사육사에게 꼬리를 흔드는 행위가 자신의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에리히 프롬이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서 말한 존재적 가치를 깊게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섬세하며 어쩌면 괴짜나 현실에 무감각한 사람이고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결코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단호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비록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편한 길이 아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가려는 다른 스토너들이다.

이들에게는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어쩌면 없을지 모른다. 그저 어떠한 우연에 의해 세상에 발을 딛게 된 것이며 이 땅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을 제대로 응시하면 응시할수록 세상은 부조리하며 수치심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그런 이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하루하루 절실하게 살아가자고 속으로 되뇔 뿐이다. 비록 자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지라도 말이다.     



사랑한다는 것


그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묘사를 할 때 그것은 빛나는 것이며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처럼 찬란한 것¹이었으며 경건함을 가득 담은 기도처럼 침묵 속에서도 충만한 것이기도 했다. 아처 슬론으로부터 문학 강의를 들었을 때부터 자신의 미래를 문학사로 바꾸었을 때, 사랑하는 아내는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의 아이를 보며 행복감에 젖을 때, 캐서린이라는 여인을 통해 사랑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이 열정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는 실로 그러했다. 그 사랑이 사람이든 시詩든 간에 비록 세월이 흘러 그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그의 몸이 부작용들이 있더라도 사랑은 영혼에 열정을 실어주고 스토너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주는 행복이 단순히 우리의 몸에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성을 통해 이해하기도 전에 사랑은 우리의 영혼과 가슴에 알 수 없는 충만감과 황홀감을 준다. 또한, 가랑비가 촉촉이 내리는 아침나절에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스토너는 열정을 다해 사랑했다. 비록 그것이 세상이 이해하는 방식의 - 기존 관념으로서의 - 사랑은 아니었을지라도 그에게 열정을 심어준 것은 그 하나하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열정을 다하는 문학 앞에서 타협할 수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한 사랑을 헛되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그러한 가치를 통해 타인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억압이나 ‘할’ 수 있는 비열한 행동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이겨낼 수 있던 것이다. 마치 어느 한 신실한 종교인이 신을 향한 거룩한 마음과 사랑을 전하는 것 이외에 물질적 가치나 자신에게 가하는 수많은 핍박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 역시 그러한 이상 위에서 살아간 인간이었다.

나는 근래에 그러한 사람을 한 명 알게 되었다. 그는 사회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소위 ‘찍힌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고 명절이면 선물을 대접해야 하며 술자리에서 아부해야 하는 다소 전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제의식은커녕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섬세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행위를 옳지 않다고 말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회생활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모든 인사 고과에도 불이익이 생겼다. 그러한 사람과 우연히 함께한 술자리에서, 그가 내게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 아내와 아이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이상을 가진 사람들의 영혼은 얼마나 크고 거룩한가! 그 사랑이 그 사람의 영혼에 크게 걸려 있기에 그는 직장생활의 고독감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고독의 그림자  


나는 그의 책에서 평생을 고독과 벗 삼으며 살다 간 어느 외로운 시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고독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작

고독은 비처럼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멀리 외딴 벌판으로부터 고독은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가서는
처음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고독은 그의 책 어디에나 존재한다. 배경을 묘사하거나 인물과 대화할 때에도 고독의 기분은 씻겨지질 않는다. 심지어 그러한 고독은 열렬한 사랑을 하는 이를 바라볼 때에도 느껴진다. 캐서린 드리스콜. 스토너의 눈을 통해 그녀를 볼 때면 나는 로트렉의 그림이 떠오른다. 흰 셔츠를 입고 있는 여인을 그린 모습에서 드리스콜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윽고 뭔가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가 그린 그림의 배경, 질감과 색감, 구도 등을 통해 느낄 수 있던 그 고독감처럼 스토너의 이야기 속에서도 고독감은 그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대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더욱이 스토너 자신의 생각 외에 타인의 생각은 드러나지 않는 대화나 기술記述로부터 우리는 마치 내 주변인들의 생각을 알 수 없게 됨에 따라 느끼는 고독감과 비슷한 정서를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덩달아 한동안 고독감이나 상실감을 느낀다. 스토너의 시선만이 나의 시선이 되고 현실 세계에서나 소설 세계에서나 나는 타인의 생각을 짐작밖에 할 수 없는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로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독은 스토너의 세월과 함께 흘러간다.



우리의 삶도 그처럼 고독한 까닭은 무엇일까? 플라톤의 『향연』에서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우리가 고독한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가 원래 하나였다가 둘로 분리된 인간이며 그로 말미암아 한쪽은 다른 한쪽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바로 사랑이란 그러한 상태에서 전체,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욕구이며 인류가 행복해지는 길은 에로스(사랑)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각자가 원래부터 자기에게 속한 짝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고독한 이유는 그러한 욕구, 즉 사랑(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생각을 그것을 이 소설에 투영한다면 스토너는 끊임없이 완전한 사랑을 추구하던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그는, 그가 존재했던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자유인이었다.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사랑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환희의 감정은 완전한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을 덮으며 - 의롭게 살다 간 이를 생각하며.


그의 고독을 이해하고,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혹시 알까? 내 주위에 있던 한 늙은, 색깔 없는 누군가가, 어쩌면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다 간, 거룩한 이였을지도…….

그러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묘비 위에 선선한 바람이 불기를 소원한다.



¹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 사랑의 어떻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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