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여행기. (1)
※ 아래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한 여행처럼 의미를 담아 쓴 연작 형식의 글입니다. 제목은 내용 중 일부에 관한 이야기니 참고바랍니다.
주말이라고 10시나 다 되어 집에서 나왔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피카소 전을 볼까 하다가 귀찮은 마음이 생겨 그냥 학교로 직행했다. 큐비즘을 테마로 해서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긴 한 터라 이번 달 내로 한번은 볼까 한다. 전시 기간도 이번 달까지라 정말 수요일 저녁 문화가 있는 날에 갈까? 근현대 미술사 관련해서 언제 한번 다루긴 해야 할 텐데, 고민 중이다. 아침 8시 모임으로 한번 해볼 것인가? 혹은 그냥 책으로 다시 읽을 것인가?
모임을 하지 않아도 지적 생각을 할 수는 있으나 가장 큰 장점은 지속성이다. 두 번째는 다른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질문을 계속 생각해 낸다는 거 아닐까 싶다. 세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성실성, 창조성, 문제의식에 관한 것인데 사실 탁월함이라는 것을 얻으려면 꾸준한 가운데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질문하여 창조적 생각을 실현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니까. 한 번의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의 반복적 행동 내지는 습관이 탁월함을 만든다는 격언을 늘 기억해야 한다. 탁월함이란 내면화된 습관과도 같으며 숨 쉬듯, 물 마시듯, 밥 먹듯 해야 완성된다.
생각이란 놈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 그 방향을 잡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키우지만, 벼를 키우려면 물꼬를 튼 뒤 가둬두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물꼬를 트고 생각을 담아 두며 꾸준히 지켜봐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공동체의 모임과 토론이라는 것은 논에 물을 대는 행위와 같다. 여기저기 시간과 공간에 따라 흐르는 생각을 한곳으로 모아준다.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만 일단 '무슨' 모임을 만들고 나서 생각이 모이다 보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말히자면, 토론을 통해 '나는 내가 그것으로부터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로부터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얻는 것이다. 토론은 앎에 대한 미덕보다도 ‘미지(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와 무지에 대한 미덕’이 더 크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난 미술사 아침 모임은 정말 값진 시간이었다. 아침임에도 비교적 성실히 참여해줬고 모임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었으며 끝나고 나서도 계속 연락할 사람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좋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모임을 운영하면서, 참여자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으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내가 얼마나 성실히 했고 무엇을 얻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성장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타인의 성실성 여부와 관계없이 내가 먼저 성실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관계의 기본이며 자신에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는 장수가 부하를 이끄는 것, 혹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덕목은 세 가지가 있으니 덕(인간성), 힘(카리스마), 그리고 제도(시스템)라고 한다. 손자는 그 세 가지 중 제일이 덕이라고 했는데, 내 생각에 그 덕의 기본은 ‘관인엄기’라고 본다. 이는 '자신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라.'인데,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신뢰를 하기 때문이다.
지덕체도 손자병법에서 장수가 부하를 이끄는 방법 중 개인 수양에 해당하는 것과 유사하다. 올바른 지식을 공유함으로서 이득을 주고 덕은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며 체는 개인의 힘과 카리스마를 키운다. 이는 지덕체를 통한 개인의 수양이 다른 사람을 이끌 힘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가지를 성실히 해야 타인에게도 자신이 뜻하는 바를 피력할 수 있다.
집에서 나와 학교의 IT 카페로 향했다. 도착해서 한동안 일기를 쓰다가 가루 커피를 두고 와서 결국 못 참고 집에 들러 다시 가져왔다. 베트남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가성비가 좋다. 향이나 맛에서도 기존에 먹던 커피보다 나은듯하다. 일기를 쓰다 보니 12시가 넘어서 또 가격파괴 분식점으로 갔다. 간만에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여기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는 정말 맛있다. 다른 거 없이 김치찌개, 된장찌개 전문으로 해도 잘 될 거 같았다.
갔던 시간엔 사람도 많고 설거짓거리도 많아 사람이 빠질 때까지 홀서빙과 설거지를 해주었다. 이모는 저렇게 혼자 12시간을 일한다. 그 자체로도 근로기준법에 저촉될 것 같은데 그 외에도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문제는 사장이 그것을 지킬 의지가 없고 이모들도 그것을 다 지키면 자기 수입이 적어지거나 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모네들을 보면 현재 최저 시급이나 경제 정책과 관련된 서글픈 단면들을 볼 수 있다. 규모가 좀 있다면 투쟁이라도 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쟁취라도 하겠으나 일단 자신들이 경제적 이득이나 줄 거나 혹은 이곳을 그만두었을 때 생길 위험이 클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저 시급이 정해져 있기라도 하니 당신들 시급들에서 올해 조금 더 오른 것인데, 그래도 부당한 대우를 듣다 보면 분노를 금치 못한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나 다를 바 없을 정도이다. 마음 같아서는 신고해버리고 싶어도 당신들이 그다지 원치 않는다.
법은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효력을 얻지만, 사회 취약 계층은 그들 스스로 법의 발동을 위한 의지를 갖추지 않거나 법망의 바깥에 있을 수 있으니 그 그물망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도 스스로 의지를 갖춰야 한다.
“더 늙으면 저 섬 같은 곳에 가서 조개도 캐고 나물도 무쳐가며 살 거야.”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10여 년 전에 갔던 (어쩌면 그녀에게는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소이작도로 휴가를 떠난 이야기를 했다. 해삼, 조개를 잡아다 먹은 얘기, 그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민박이 저렴했다는 이야기 등등.
나는 안다. 이모가 이 일을 다시 시작하고 나선 매일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단 두 번밖에 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그 이후에는 제대로 된 휴가 한번 가지 못하고 있었겠지. 오래 안 살고 안 아프게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죽음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넌지시 말하는 이모를 보며 난 할 말이 없어서, 단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려고 우리 오라 보자고 말할 따름이었다.
나는 과연 정의로운 사람인가? 이런 상황에 있는 이모를 내버려 두는 게? 나를 두고 만류하는 이모를 보고 이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 아니므로 쉽게 재단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녀에게는 한 푼이 더 중요했고 그녀에게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돈을 벌고자 애썼기 때문이다. 최저 시급이 오르고 적은 시간을 일하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조금 낮은 비용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게 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푼의 돈이라도 더 얻는 게 그녀에겐 중요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땐,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란다." 문득 위대한 게츠비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이익을 조금 덜 보더라도 사람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으냐고 말하지만, "시간이 남아서 뭐하게?"라고 되물으면 이내 할 말을 잊고 만다. 그러고선 그녀가 달리 생각해주길 기다리며 그저 내 삶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녀가 그렇게 사는 것도 그녀의 선택이고 나는 법보다도 그 선택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존중한다. 그녀는 내 가족이 아니고 우리는 단순히 식당 종업원과 단골손님보다는 조금 더 친밀한 관계일 뿐이며 그녀의 처지를 고려할 때 그녀 스스로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의 삶에 내가 더 깊게 발을 담그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적당한 외면과 적당한 침묵, 그리고 적당한 위로…. 이를 통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모래알을 씹는듯한 일상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인다. 나는 정의로운가? 서글프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점심을 그렇게 먹고 IT 카페로 갔다. 짐은 그대로 있고 변한 것은 시간 말고 없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그토록 빨리 가는 까닭은 접하는 공간이 익숙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공간에 계속 있으면 시간이 변해도 변한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다가 공간을 나와 생각해보면 한참 지난 것을 깨닫게 되는 거겠지. 아인슈타인이나 물리학자들이 생각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 수 있음을 몸으로 느끼는 것일까?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계속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남겼다. 과학 철학에 대한 관념 중 칼 포퍼의 과학의 점진적 변화와 쿤의 과학혁명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왔다.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에 그 책의 일부분 가운데 ‘뉴턴이 프톨레마이오스 과학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천체 운동의 현상에 대한 해석에서 벗어나 천체 운동의 원인이 무엇인가로 관점을 달리했기에 그 설명이 더 탁월했다.’라는 부분이 생각났다. 책에서 볼프강의 주장에 대해 오토는 원인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관념, 현상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또 그 원인의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의 원인을 찾는다는 무한회귀적 물음을 해야 함을 비판했다. 이는 종교인들이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신이라는 이름으로 귀결시켜 어떤 생각을 해보지 않고 그저 믿으라고 한다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엔도 슈사쿠의 책 ‘침묵’에서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의 의지로 존재하는 자라고 한다.
길 위에서는 그런 생각과 더불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 운동에서 원과 주전원에 따른 계산보다 뉴턴이 발견한 역학이 더 탁월한 것이며 그것이 서로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이 현상을 비교적 더 잘 설명하고 있다.’는 관점보다 ‘그 운동, 더 나아가 만물의 운동에 대한 원인에 접근했기에 차이가 있고 더 탁월하다’는 관점을 인간관계에 접근해보면 어떨까 했다.
즉, 어떤 이의 어떤 행위에 관하여 그 현상 자체를 두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 행위의 원인에 대해 이해를 한다면 더욱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그 사람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행위 동기, 나아가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그 사람을 비롯한 보편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바로 뉴턴이 말한 그 원인이 중력 상수를 발견한 것일 텐데, 어쩌면 인간에게도 중력 상수와 같은 변수가 존재하고 그것을 풀어낼 수 있다면 주식 시장이나 나아가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경제학의 문제는 어쩌면 프톨레마이오스의 그것처럼 현상에 집중하고 그것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케인즈는 인간의 경제 활동은 합리적 이성만이 아니라 ‘야성적 충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행동 경제학자들도 비슷하게 심리적 충동 부분을 들고 와 주류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관, 호모이코노미쿠스 관점을 비판한다.
‘과학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주류 경제학에 만약 이런 중력 상수를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을 계산 가능한 수치를 찾아낸다면? 그 힘을 감정 상수라 칭하도록 하자. 그 감정 상수를 발견해 낸다면 주식 시장이나 인간계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녁의 길을 걷다 보면 사고가 난 듯 다 부서지고 천 같은 것으로 덮여 있는 승용차나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 내버려둔 음산한 집들을 발견하게 된다. 간혹 그 곁에 가면 근래의 뉴스들을 생각하며 음산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가령 이렇게 차에 덮인 천을 들치고 안을 들여다보면 어느 실종된 이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음산한 상상이 고개를 쳐든다. 물론 인적이 드물고 행여 소변이 마렵지 않은 이상 그것들이 있는 안쪽까지 가진 않을 것이다.
행여 호기심으로 들춰보는 사람이 있을까? 범죄의 악취는 그런 곳에서 나는 법이니까. 며칠 전 동생에게서 들었던, 한 인터넷 방송에서 휴가체험을 하다가 시체를 발견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런 곳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잠깐 천을 들춰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내게 이제 저곳은 슈레딩거의 고양이가 되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장갑을 깜빡하고 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준기씨의 휴대폰은 놓고 가지 말라고 챙겨줬으면서 정작 자기건 안 챙기는 바보 같음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창고 책상 위에 올려뒀으니 누가 가져가진 않겠지. 남의 물건만큼 내 물건도 잘 챙기자!
저녁에는 치킨 반마리를 주문해서 남은 맥주 한 병과 마셨다. 저렴하게 느끼는 행복이라 외로움을 조금은 가셔주었다. 인터넷으로 드라마 하나를 보았다. 보던 도중 문득 일하기 전 잠시 영진이랑 이야기했던 제임스 조이스에 관하여 생각했다. 이상한 인간, 이상한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율리시스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나온 것 같은데, 제임스 조이스와 그의 딸 이 분석심리학자 칼 융에게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이 생각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난 까닭은 보통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독특한 소재와 캐릭터, 독특한 스토리를 중심으로 엮는다. 혹은 인간의 독특한 내면 심리를 담기도 한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세 주인공들은 보통의 인간들이며 책은 이들이이 하루 동안 겪는 보통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그것을 독특한 구성으로 엮어 독특한 소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하루 동안의 방대한 여정을 오디세이아의 여정에 대입했다.
책은 한 인간이 긴 시간 동안 겪는 방대한 이야기 대신 짧은 시간 동안 의식의 밑바닥 깊이 파고들어 간다. 그것은 결코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의 인간의 깊은(위대한) 이야기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저자는 위대한 이야기를 쓰려면 위대한 소재가 필요하다며 왜 새우가 아닌 고래를 선택했는지 말한다. 그 이후 수많은 소설은 비록 고래같이 큰 것은 아니더라도 독특한 소재, 독특한 캐릭터, 독특한 스토리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는 그 모든 것을 깨뜨려 소설을 완성한다. 무가치하다고 일상의 것들도 이야기될 수 있음을 알린 것이다. 사실 어느 것도 무가치한 것이 없음을, 우리 내면에서 부여한 의미에 따라 돌멩이도 보석이 될 수 있음을 알린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에 대한 통념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나 다른 예술가들이 이러한 시도를 함에 따라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 예술 소재 선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우리의 일상의 삶을 예술로 만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혁명이 작용하고 그것을 대중과의 접점이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적용하기 시작하며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았다. 하루의 삶이 결코 무가치 않으며 특별하지 않은 우리의 삶도 예술일 수 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책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삶은 아름답다. 당신의 행위는 10억 광년을 넘어서 누군가에게 닿을 빛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은 그토록 위대하고 거룩하니, 그대 부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길'."